Notice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담

무궁화꽃 본문

생활 이야기

무궁화꽃

복담이 2019. 8. 15. 12:25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왜 근역이라고 불렀을까?

 

이것은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이름을 변별하여 증명하는 글이다.


이를 보면, 지금까지 전하는 동양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무궁화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군자국(君子國)에는 훈화초(薰花草)가 있는데

이때의 '훈화초'는 바로 무궁화이다.

 

또한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며 이 나라의 지방(地方)

1천 리이고 무궁화 나무가 많다는 것"으로 우리나라를 소개하고 있다.


글이 무궁화에 대하여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거이다.

여기에서, "아침에 피어났다가 저녁에 시들어 죽는다."

말은 무궁화 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래 무궁화는 꽃피는 기간이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100일 동안 길고, 낱개의 꽃은 이른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기 때문에 날마다 신선함을 느끼게 하며

며칠이 지나면 먼저 핀 꽃은 떨어지고 새로운 꽃이 그 뒤를 이어 피어난다.

 

이처럼 꽃과 꽃이 끝없이 이어서 피는 꽃이란 뜻에서 무궁화라고 한다.

또한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에서

신라를 근화향(槿花鄕 ; 무궁화의 나라, 신라를 뜻함)이라 하였으니

무궁화는 신라시대에 이미 나라꽃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구당서(舊唐書)>, <지봉유설(芝峯類設)>,

<해동역사(海東繹史)> 등 많은 문헌에서

우리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로 일컬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에 인용된 텍스트에 따르면 무궁화는 단군 개국 때

목근화(木槿花)라는 이름이 나온 이래

우리나라를 무궁화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큼 대표적인 꽃나무였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군자의 나라는 사람들의

민족성이 군자답고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고

예찬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무궁화로 상징하여

'무궁화 피는 화려강산'으로 인식하여

근역(槿域)내지는 근화향(槿花鄕)이라 불렀던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불릴 만큼 당시에는 가는 곳마다

우리나라의 가장 두드러진 아름다운 꽃인 무궁화가 만발하였다.

무궁화는 다른 꽃처럼 간사스럽고 요염한 자태의 꽃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민족성과도 같이 품위를 갖추고 의젓한 격조를 지는 꽃이다.


내재(內在)의 미를 겉으로 발산하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함초롬히 머금고 있어 가히 군자의 꽃임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던지라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

묵객(墨客)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무궁화는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서

수천년간 피고 지기를 반복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우리 민족의 꽃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무궁화는 긴긴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얼과 혼 그 자체였다.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가사에서도 볼 수 잇듯이

무궁화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무궁무궁 피어날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발해의 꽃은 무궁화였다.


정효공주 묘비는 규형(圭形)이고,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위 부분은 뾰족하고 밑면이 네모이며

전체 높이는 105cm, 너비는 85cm, 두께는 26cm이다.

묘비에는 18행과 728자의 글이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졌다.


() 1, () 12, () 5행이며

정혜공주 묘비와 달리 간지(干支)는 새기지 않았다.

묘비의 가장자리에는 장식선이 새겨졌으며

옆면과 뒷면은 잘 다듬어져 있을 뿐 아무런 새김도 없다.


비문은 중국 당대에 유행한 전형적인 변려체(駢儷體) 문장으로

서문에는 공주의 행장(行狀), 명문에는 공주에 대한

칭송과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정효공주는

대홍보력효감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의 넷째 딸이다.


출가한 뒤 남편이 죽고, 수절하던 정효공주도

대흥 56(792) 619일 임진에 죽었다.

이 때 나이 36세로 슬하에는 딸을 하나 두었다.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


그 해 1128일 기묘에 영곡(染谷)

서원(西原)에 배장(陪葬)하였다."로 요약된다.

정효공주묘비에 쓰여진 내용을 살펴보면 구절구절마다

발해의 독자성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문 안에 천손(天孫)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천손 의식을 계승한 것이다.

묘비에 문왕을 칭할 때 '황상(皇上)''대왕(大王)',

'성인(聖人)'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내용 역시 발해가

자주성과 독자성을 지녔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그 외에도 발해인들의 이념체계를 설명해주는 구절이 있는데

'대홍보력효감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문왕의 칭호로 '대흥''보력'문왕 당시의

연호에서 나온 것이고 '효감'·'금륜'·'성법'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이와 더불어 정효공주의 고분위에 불교건축인 탑이 있다는 점

정효공주의 무덤 주변에 능을 지키는 능사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는 점 등은 발해인들 사이에 불교신앙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이채로운 점은 이 무덤이 부부 합장무덤이라는 점이다.

불교 교리에서는 부부 합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효공주비문을 읽어보면

정효공주는 수절을 한 유교적 성향을 쌓은 열녀이다.

승려 외에 사람이 불교 건축인 탑에 안장되는

사실도 드물며 불교도가 합장되는 경우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요소와 유교적 요소를 가진

고분이 만들어 진 것은 문왕의 개혁을 통해

발해 사회 안에서 두 요소가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정효공주를 남편과 함께 탑 속에 합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유교와 불교를 결합하여 사용한 매장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내용이 있는데, 바로 무궁화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를 살펴보자. "생각컨데 공주가 태어나매 어려서 부터

진실로 아름다웠고, 비상하게 총명하고 슬기로워 널리 듣고 높이 보았다.


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東宮)의 누나가 되었으니

옥같은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길 수 있었다. 이것이 둘째이다.

정효공주는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남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그는 남편이 죽자 맹세하였던 마음을 변치 않고

슬픔을 머금으면서 굳게 정조를 지켰다.


정효공주는 봉건사회에서 부녀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봉건윤리 도덕규범인 부덕, 육행, 상종에 밝았기에 정효란 시호를 받았다.

이러한 인물이었으니 정효공주의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순화(舜華)에 비유하고 있다.


'순화'는 무궁화꽃, ()는 꽃이란 뜻인데,

이 구절은 <시경(詩經)>에 나온다.


국풍(國風) <정풍(鄭風)>, "아가씨와 함께

수레를 탔는데 그 얼굴이 무궁화처럼 예뻤어요.

(有女同車, 顔如舜華)"를 말한다.


무궁화가 사랑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꽃의 강건함과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입니다.

 

정효공주의 매력을 시경의 표현대로 무궁화와 같았다고 칭송하고 있다.

처사의 집을 두른 무궁화을 붉은 무궁화 紅槿花 (<사가시집>52)

 

紅槿花開秋更催 무궁화 붉게 피어 가을 더욱 재촉하니


朝開暮落復朝開 아침 피고 저녁 지고 아침에 다시 피네

可憐續續開無盡 이어서 계속 피니 얼마나 어여쁜가

猶勝情人去不來 떠나선 오지 않는 정인보다 더 낫구나!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의 생리를 情人과의 관계에 견주었다.

옛사람들은 보통 무궁화 피는 시기를 6월로 간주했다.

음력 6월은 여름의 막바지로 가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자연스럽게 상실과 분리의 정감을 일으킨다.

시의 화자는 가을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피어선 떨어지는

무궁화를 보면서,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정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번 가면 오지 않는 야속한 정인보다는

쉬이 지나 다시 피는 무궁화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무궁화로 애정 관계를 읊은 흔치 않은 작품이다.

 

이밖에 서거정은 여러 편의 시에서 무궁화를 노래햇다.

서거정의 시에 등장하는 무궁화는 대부분 집을 두른

무궁화의 울타리의 모습이고, 그 빛은 대개 붉은 색이다.


이때 무궁화 울은 소박하고 단아한

처사의 집을 상징하며 무궁화늬 붉은 빛은

산림에 처해서도 식지 않는 구도의 마음이나 곧은 뜻을 나타낸다.

    

지봉유설과 무궁화


이글은 이수광이 <지봉유설>의 제국부(諸國部)에서,

<산해경>기록을 인용하면서 우리나라를 설명한 것이다.

"바다 동쪽에 군자의 나라가 있으니, 의관(衣冠)을 갖추고

칼을 차며 양보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으며

무궁화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고

또한 <고금주>에는"군자의 나라는 지역이 사방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다."고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또한 당()나라의 현종(玄宗), "신라를 군자의 나라"고 한 말과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은 겸양하고 지중하지만

호시국(발해)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무궁화의 나라는 바로 신라를 일컫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737: 성덕왕 36)신라전

기사에도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무궁화의 나라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미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으로 미화하여 불렀던 것이다.

 

청장관전서에 실린 작품과 무궁화

 

조선 후기의 실학자였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嬰處

동방일사(東方一士신천옹(信天翁)이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

이르기까지 달통하였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하여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여 검서관(檢書官)을 등용할 때

박제가·유득공·서이수 등과 함께 뽑혀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학문을 깊이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저술을 망라한 시문집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청장관'은 저자의 호이다.


청장(靑莊), 신천옹(信天翁)과 같이 해오라기 종류의

수금(水禽)으로서 앞에 닥치는 먹이만을 먹고 사는 청렴한 새라고 한다.

즉 이로써 호를 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성격을 상징한 것이라 하겠다.

 

1) <윤경지(尹景之이명오(李明五서이중(徐而中박치천(朴穉川)과 함께>(이덕무)

 

그는 탐구벽이 대단하여 별로 사숙과 관련 없이 거의 독학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그야말로 박학다식하였으며

기문이어(奇聞異語)를 초록(抄錄)하기 좋아하여

<영처시고(嬰處詩稿)>와 같은 글을 남길 수 가 있었다.


<윤경지·이명오·서이중·박치천과 함께>라는 시는 바로

 <영처시고>에 실려 있다. 이는 이덕무가 어릴 때와

젊은 시절에 지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영처(嬰處)는 영아(嬰兒)· 처(處子)의 뜻이나

저자 자신의 자호(自號)처럼 제명한 것이다.


이 시에서 무궁화 강산 즉, 우리나라에 천년사직의 나라를 세울 적에

기자(箕子)가 백마를 타고 동쪽인 조선으로 왔다고 한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尹景之 李明五 徐而中 朴穉川 共賦>


 

北斗闌干挿自明 북두별 빛을 쏘아 내리비쳐 밝으니

虛襟天入在無聲 빈 가슴에 소리없이 하늘이 들어오네

金城大鐍山何邃 금성(金城)의 큰 자물쇠는 산하가 웅장하고

太極空囊上下輕 태극의 빈 주머니는 위아래가 가벼워라

幽水精彩泠然古 유수의 정기는 청신하여 예스러운데

羽宵碧骨不勝淸 우소의 벽골은 맑기도 하여라

槿花亥立千年國 무궁화 강산에 천년 나라 세울 적에

白馬東到孤雲橫 백마가 동으로 오니 외로운 구름 비끼었네

 

(<청장관전서> 1嬰處詩稿)

 

적막한 6월에 홀로 피는 꽃


6월에는 꽃이 없는데, 다만 무궁화꽃이 홀로 피어


생각에 잠기게 한다. 갑자기 시상이 일어

소동파의 시 <정혜원해당>차운하여 송옹에게 받들어 보이다.

무궁화 꽃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대략 네 구마다 시상이 바뀐다.

 

온갖 꽃이 유월이면 다 범목이 돼 버리기에 무궁화가

스스로 나 뿐이라 말하나니

외로운 향기가 꽃 없는 때를 잇기 때문이요

심히 고와서가 아니요

세속 초월은 더욱 아니야

아름답고 화려함을 도리와 겨루게 한다면

천박한 자질 활기 없어 공곡에 버려지리라

연꽃 뒤며 매화 먼저라 아 융성한 시기요

옥방과 주관은 지금 화려한 집이로세

호화로운 자리에선 비단옷도 곱다 않거니와

가난한 집은 냉잇국도 고기만큼 맛나다네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짐을 무어 아파하랴

동쪽엔 지고 서쪽에 핌이 절로 만족하거늘

다식에 판을 박아라

그 모양 볼만도 하고 연지를 뺨에 발라라

자태 또한 아름답네

어찌 벌 다리에 묻힐 노란 꽃가루가 없으랴

오히려 매미 배 채울 맑은 이슬도 있다오

풀을 깔면 때로 요의 역할이 되기도 하고

잎을 불면 관현악의 소리도 나오나니

길이 휘파람 불며 번화한 곳 생각할 것 없고

또 의당 머리 굽히고 안목을 낮추어야지

쇠한 음향은 회풍을 나무랄 수 없겠거니와

특이한 빛이야 어찌 촉까지 더 바랄 수 있으랴

촉규화에 비하면 참으로 쓸데가 없고

밑둥은 동백나무 비슷하나 그만은 못해

조물주의 안배가 각각 신묘에 이르렀나니

마음속에 번뇌를 가질 필요가 없다오

내 시가 순하여 가벼이 평한 것 아니건만

행여 꽃마음에 저촉됨이 있을까 염려로세

 

[六月無花 唯木槿檀場 使人感念 窣爾有作 遂次東坡定惠院海棠韻 奉示淞翁]

(<다산시문집> 6)

 

무궁화 수난의 시대적 배경

 

인류의 역사에 민족의 이름으로 특정 식물이 가혹한

수난을 겪은 일은 우리 나라의 나라꽃인 무궁화가 유일한 것이다.


무궁화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겨레의 맥락 속에

숨쉬어 온 꽃이기에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 수난과 함께 피폐(據製)되고 빼앗겨

버리는 참혹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만주, 상해, 미국, 구라파로 떠난 독립지사들이

광복 구국정신의 표상(表象)으로 무궁화를 내세우자

일본은 여기에 당황한 나머지 무궁화를 보는 대로

있는 대로 불태워 버리고 뽑아 없애 버렸다.


일제는 나라꽃 무궁화를 눈에 피꽃이라 하여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선다고 거짓 선전하였으며

'부스럼 꽃이라 하여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긴다고

하는 등 갖은 말로 우리 민족의 기개(氣觀)를 표현하는

무궁화 탄압에 극악(極惡)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꽃 무궁화에 관한 수난이 가중되면

될수록 우리 민족은 더욱 우리의 정신을 대변하는

무궁화를 사랑하고 숨겨가면서까지 지켜 왔다.


일제의 무궁화 탄압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무궁화

민족얼을 심어 주고 재인식 시키기에 앞장섰던 인물로

우호익(禹浩翊)과 남궁 억(南宮憶)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우호익은 우리나라 말과 글이 일제의 쇠사슬에 묶여 있던

암울한 암흑기에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무궁화의 사적가치(史的價植)를 고찰하였고

조선의 국화(國花)로 숭배하게된 유래를 논증(論證)해 보임으로써

나라꽃 무궁화로서의 위상(位相)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서 남궁 억은 무궁화 말살()을 위해 광분하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궁화 묘목을 길러 전국에 나눠 주고

무궁화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식어 가고 꺼져 가는

구국혼(救國塊)을 불러 일오키는데 선봉적 역할을 하였다.


우리 나라 나라꽃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

생사고락(生死)을 같이 했던 무궁화는

또다시 치욕스런 수난을 당하는데 그게 바로

동아일보에 연재(連載)됐던 국화논쟁(國花論爭)이었다.


이제 다시금 무궁화의 수난을 되새겨 보고

무궁화진가(眞價)를 평가함으로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 자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호익선생과 무궁화


우리 겨레의 가슴 깊은 곳에 겨레의 꽃으로


자리잡고 있는 무궁화가 단지 겨레를 상징하고 있는

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제의 무력 앞에

무참히도 짓밟히던 시절 무궁화를 학문적 차원에서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우호익(禹浩翊)이다.


1927년 조선사상통신사 간행의 조선급 조선민족

실렸던 무궁화고(無窮花考)는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재직하던 우호익의 진솔(眞率)한 학술적 연구의

소산(所産)인 무궁화 관련 최초의 논문으로 세상의

많은 꽃 가운데서 무궁화가 어찌하여 우리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민중의 이상화 (理想化)

추대(推戴)되었는지에 관하여 여러 문헌에

산재(散載) 해 있는 글을 종합 하여 무궁화의

사적가치(史的價値)를 고찰허였고 조선의

국화(國花)로 숭배하게 된 유래를 논증하고 있다.


이 논문은 무궁화에 관한 최초의 논문이라는 점을

차치(且置)하고라도 무궁화 연구 자료로서의 가지가 높다.

무궁화고는 무궁화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무궁화의 이칭 (無窮花異稱)', '문학상에 나타난 무궁화'

'식물상에 나타난 무궁화', '국화(國花)로서의 무궁화'

문헌에 기초를 두고 아주 세밀하게 연구 검토하고 있다.


조선 급 조선민족에 일문(日文)으로 수록됐던 무궁화고

1927동광(東光 )지 제13, 15호에 세분화되어

무궁화고(), 무궁화고()만이 연재(連載 )되었고

 무궁화고()19278동광지가 제16호로

휴간(休刊)됨으로써 끝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미지:02-01:무궁화고##그후 1928청년(靑年)

67호에 무궁화 예찬(無窮花 禮讚)이란 제목으로

무궁화고()편의 내용이 연재되면서

무궁화고는 완결(完結)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무궁화고의 전체 내용상의 풍부함과

다양하고 정확한 문헌적 고증은 논리정연(論理整然)하게

전개되어 있어, 시대에 앞선 무궁화 연구자료로서 많은

무궁화 연구가들이 전재(轉載)하는 무궁화 필독서(必讀書)가 되었다.


나라와 말과 글과 이름 그리고 심지어 밥그릇까지 빼았아 간

일제 강점기의 그 참울 했던 시기, 일제의 가혹한 압제 밑에서도

나라꽃으로서의 무궁화 위상(位相)을 정립 (定立)하고

우리 민족에게 국화애(國花愛)를 심어 주기 위해

혼신(渾身)을 다해 학문적으로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문헌고증을 통해 무궁화를 연구한 오호익의 충정 어린

공로는 우리 문학상의 무궁화에 관한 가히

금자탑(金子塔)이라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것이다.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


일제의 무궁화 말살에 관한 혹독한 탄압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무궁화를 재인식시키는 일을 시작한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바로 그 대표가 될 만한 분이 한서 남궁 억으로 무궁화가

우리 나라의 꽃으로 국민의 가슴에 심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하에서 애국교육운동에 헌신한 남궁 억의 많은

업적중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업적 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이야기, 한국위인(5),

동사략 (4)등을 지어 민족사 교육을 통해

조국애를 고취한 일이요,

둘째로는 무궁화를 보급하여 잊혀져 가던

민족의식을 고취한 사실이다.


남궁 억이 교육계에 입신한 것은 1895

토목국장 재임시 흥화학교에서 국사 시간을 맡았던 일이 처음이다.

그 후 양양군수 당시 현산학교를 세웠고, 1910년 경술국치 후에

배화학당에 재직하면서 한글궁체를 발굴하여 한글서예의

바탕을 만들었고, 꽃핀 무궁화 열세 송이로 조선 13도를 표시한

한반도 한반도 지도를 도안하여 여학생들에게 수놓게 함으로써

수실 한 올 한 올마다 민족애와 국화애를 심게 하였다.

 

이 무궁화 지도는 배화여학교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의 여학교에서 수놓아졌고 가정 주부들도

그것을 수놓아서 내실을 장식할 뿐 아니라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가슴속에 수놓게 되었 던 것이다.

 

그후 남궁 억이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들어와서

보리울학교를 세워 경영하게 된 것은 1918년 배화학당을 나와

허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선향인 모곡(보리울)에 내려온 것이

인연이 되어 사립 모곡학교를 건립하고 조국의

희망을 오직 청소년 교육에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남궁 억의 교육 내용은 근대 학교의 체제로

구성하여 체육, 음악과목까지 빼놓지 않았으며

여학생에게는 가정과목까지 이수토록 하였다.


그의 교육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민족사상의 보급으로 동사략과 알기 쉬운

국사 조선이야기를 편찬하여 역사교육에 치중하였다.

 

또한, 남궁 억은 반도 산하에 오직

보리울에서만 볼 수 있는 무궁화 묘포를 가꾸었다.

묘목을 팔아서 돈을 벌자는 것이 아니었고

위축되어 가는 애국심을 격려시키려는

일환책(一環策)으로 학교 경비 보충을 구실로 하여

무궁화 묘폭을 해마다 수십만 그루 씩 길러서

각 지방의 학교와 교회, 사회단체에 팔기도 하고 기증도 하였다.


묘목작업은 학생들의 실습시간을 이용하고

김매고 거름을 주게 하여 학생들의 무궁화에 대한

애착심과 국가관념을 넣어 주었던 것이다.

 

일제가 무궁화 묘목을 못 팔게 했을 때에는

어린 무궁화 묘목과 유사한 뽕나무 묘목을 겸해서 길러

뽕나무 묘목의 주문이 오면 무궁화를 끼워 줌으로 해서

전국에 무궁화 번식을 위한 갖은 방법을 다 취했다.


이렇게 역사교육을 하고 무궁화 묘목을 널리 보급하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던 남궁 억은 1931무궁화 동산이란

노래를 보리울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

 

<무궁화 동산> 우리의 웃음은 따뜻한 봄바람 춘풍(春風)을 만난

무궁화 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다시 소생하는 우리 二千萬(이천만) 빛나거라

三千里(삼천리)무궁화 동산 잘살아라 二千萬(이천만)高麗族(고려족)

 

나라사랑(1)》 〈한서 선생의 시가에 보면

 "무궁화 동산은 아이들이 고무줄 넘기를 할 때

운동 시합을 할 때와 행진을 할 때에 불렀으며

주일 학교에서 성적이 최고인 반에

우승기를 수여할 때 부르는 우승가" 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무궁화 동산은 한서 남궁 억의 무궁화 정신이

노래된 것으로 무궁화 시, 조선의 노래, 시절 잃은 나비,

조선진리가, 운동가등의 노래에도

무궁화가 뜻해 주는 혼이 짙게 배여 있다.


이처럼 남궁 억은 민족의 존재 이유를 무궁화의

존재 이유에다 걸었던 것이었고, 그러한 이유와 실천 때문에

일제에게 희생되었던 것으로동아일보

크게 보도된 무궁화 동산 사건 곧 십자가당 사건이다.


무궁화 동산 사건의 전모(全貌)는 다음과 같다.

1933112일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申鉉奎)

시조사원(時兆社員)을 가칭 (假稱)하여 남궁 억을 방문하였다.


남궁 억은 시조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는

신현규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가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 며 무궁화시()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고 사쿠라는 확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면연(綿延)히 피어나는 것처럼 한국 역사가 면연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보리울학교를 수색했고 따라서

무궁화 묘목도 발각되었다. 이리하여 남궁 억은

체포되었으며 보리울학교도 폐쇄되었던 것이다.

당시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국 사사키 검사의 손에서

취조를 받다가 낙착되어 6명은 기소되고 6명은

면소(免訴)를 보게 되었는데 남궁 억

노인만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이고

다른 5명은 모두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죄명으로 기소되었다는데 남궁 억 노인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내용을 듣건대, 모곡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조선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무궁화를 학교에 수만 주나 심고

학생들에게 무궁화 시를 읊어 주고 가르치며, 여교원으로 하여금

무궁화 창가(唱歌)를 가르치게 하여

민족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진 관계로

종교적 집회나 접촉에서 늘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였다는 것인데 당국으로부터 재삼 강직한

사상을 완화시키도록 권고 받았으나 이를 듣지 않고

묘목 광고(선전문)에 쓴 글 문구가 불온하였다는 것이라고 한다.

 

'무궁화 동산 사건'으로 인해 강원도 경찰부에서는

무궁화나무를 전부 없애도록 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려서

남궁 억이 애호하던 70,000()나 되는

무궁화는 일대 수난(一大 受難)만나 불살리움을

()치 못하게 되었으며 남궁 억은 1년 복역에

3년 집행 유예로 판결을 받았으나 심한 고문과

옥고(獄苦)로 말미암아 신음하다 19394월에

77세의 나이로 불귀(不歸)의 몸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무궁화 보급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다

체포된 남궁 억이 종로경찰서 에서 취조를 받던 중 한 말은

이 시대에 무궁화가 가지는 의미를 짐작케 한다.


무궁화 동산은 곧 애국의 동산이며 겨레의 광장으로

우리 민족의 우울증을 대변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소해 줄 수 있다.


무궁화는 곧 우리의 울분을 대변하고 통행 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의 광장이다." 김세한의 불굴의 얼일제의

무궁화 말살 정책에서도 의연히 견뎌온

무궁화에는 한서 남궁 억의 혼이 깃들 어 있다.


그가 전생애에 걸쳐 실현하고자 한 것은 무궁화정신이며

말살되어 가는 무궁 화를 살리는 길이 꺼져가는

민족정신을 되살리는 길이라 생각했기에 남궁 억의

항일 정신은 무궁화를 통해 표상(表象)되었던 것이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한 선각자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꿔지던

무궁화, 무궁화 정신은 암흑 속에 묻혀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을

모두 말살하려는 일제의 강압에 신음했다.


그래서 해방은 바로 민족의 해방이며 무궁화의 해방,

무궁화로 상징되는 민족정서의 해방이었던 것이다.

 

국화말살(國花抹殺) 정책

 

일제의 문화 말살은 마침내 우리겨레의 꽃 무궁화 말살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나라를 상징해 주는 태극기를 전국적으로

압수(押收)하여 없애 버렸던 일본 제국주의는 국기 다음가는

민족상징인 나라꽃, 즉 무궁화를 없애는 작업에 착수(着手)하였다.


우리 나라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제정한 일이 법적(法的)으로는

없었지만 온 국민은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굳게 믿어 왔었다.


'삼천리 반도'라는 단어 위에는 반드시 덧붙여져

'무궁화 삼천리'로 일컬어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조상 대대로 사랑하고 지켜 온

무궁화를 잃어 버린 조국을 사랑 하듯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무궁화로부터 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굳센 의지를 배워

우리도 언젠가는 기어이 독립하리라고 결심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겨레의 마음속에서 무궁화를 가꾸면서 독립정신을 키워 나갔다.

 

이와 같은 우리의 민족성을 감지(感知)

일제는 나라꽃에 대한 악전선에 혈안(血眼)이 되어 있었다.

 

이것 역시 민족의식 말살정책의 전초(前哨)적인 작업으로

나라꽃 무궁화 를 '눈병나는 꽃(눈에 피꽃)'이라고 하며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했고 '부스럼 꽃'이라며

무궁화의 꽃가루가 살갗에 닿으면 부스럼이 생긴다는 등

무궁화를 왜곡(歪曲), 날조 (捏造)하기에 광분(狂奔)하였으며

무궁화 말살정책을 위한 터무니 없는

술책(術策)과 계교(計巧)를 예사로 자행했다.


이리하여 이른바 무궁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곧 국화말살(國花抹殺) 정책이다.

 

일제의 나라꽃 무궁화에 대한 잔악무도한 말살정책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서전에 잘 나타나 있다.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2천여 년전 중국에서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조시대에는 온 국민으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상, 의학상에 진중 (珍重)한 대우를 받았는데, 영국의

장미처럼 국화로 되어 있다가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서서

이화(李花)가 왕실화로 되면서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부터 차차 소원해진 것이다.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부터 유지(有志)들은

민족사상의 고취와 국민정신의 통일 진작을 위하여

글과 말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모든 꽃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그 수명이 잠깐이지만

무궁화만은 여름에서 가을에 거쳐서 34개월을 연속 필 뿐 아니라

그 고결함은 위인 (偉人)의 풍모라고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궁화강산' 운운하는 것은 자존 (自尊)

조선의 별칭인데, 대정(大正)8년 기미운동(3.1운동을 말함)

이래 일반에게 널리 호용(呼用)되었으며

주로 불온(不穩)의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화(槿花), 무궁화, 근역(槿域)등은 모두 불온한 문구로 쓰고 있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고등경찰사전의 규정은 곧

무궁화 말살 책동의 근거가 되며 지시가 되고 법이 되었다.

 

이러한 악전선은 곧 한반도 식민정책의 적극적인 정책으로

비록 한 그루의 꽃나무에 불과한 무궁화이지만 여기에는

민족단결의 근거를 만들 수 있는 소지(素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와 무궁화


동아일보 창간호(192042일자)의 창간사에서는



東方亞細亞 無窮花동산 속에 二千萬朝鮮民衆一大光明하노라

(동방아세아 무궁화 동산 속에 이천만 조선 민중은 일대광명을 견하노라).”

라고 하여 조선을 무궁화 동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동아일보 제호도안도 둘레를 무궁화 띠로 하였다.

그 후 193011일에 제호를 한국 지도와 무궁화로 채운 도안으로 바꾸었다.

동아일보는 제호도안의 배경뿐 아니라 사진과 기사를 통하여

무궁화를 소재하고 이를 통하여 민족정신과 저항정신을 표시하였으나

1938년에 이르러 제호도안의 무궁화가 일제 검열에 걸리게 되었다.

이 후, 193829일자부터 무궁화와 지도가 삭제되고 제호만 실리게 되었다.

현재의 제호는 1945년 광복 후에 복원된 도안이다.

 

조선소년군과 무궁화휘장


192210월 조철호 선생은 구국청소년운동을 목적으로


배재학교와 중앙고보 학생중심으로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였다.


조선소년군과 정성채 선생이 발족한 소년척후대 등은

1924년 이상재 선생을 총재로 하여 통합되었으나

19349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고

19463월 사단법인 보이스카웃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선소년군은 무궁화 화환 안에 태극마크가 있는 휘장을 사용하였다.

1937731일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강연회의 안내를 맡았던 조선소년군의 휘장이 문제가 되었다.


그 날로 휘장이 새겨져 있는 물건들이 모두 압수되고 간부들이 구금되었다.

이 후, 조선수년군의 훈련 교과서인 교범까지 압수되고

집회를 포함한 모든 행사에 형사들이 감시가 따라 붙었다.

일제는 이 기회에 조선소년군을 일본의 어용단체인 건아단과

통폐합하려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애국활동으로 간주되어 결국 93일 강제해산하게 된다.

 

중앙학교와 무궁화 교포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설립한 중앙학교는 교표를


中央자를 무궁화 화환을 둘러서 사용하였다.


교가에서는 흰뫼와 한가람은 무궁화 복판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교표와 교가의 무궁화를 일제가 문제 삼아 1939년에

교가를 금지시키고 교표의 무궁화화환 대신 월계관을 사용하게 하였다.


개교 100주년의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에서는

현제 최남선 선생이 작사한 원교가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화도 무궁화이다.

 

오산학교와 무궁화 동산

 

190712월 평북 정주에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는 지도교사로는 윤기섭, 유영모, 장지영,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이 있었고, 교장으로

이종성, 조만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거쳐 간 곳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학교에는 무궁화동산이 있었는데

일제가 무궁화동산의 철거를 지시하였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자

수업을 못하게 하고 강제 휴교하였다고 한다.

오산학교는 1919년 교직원과 학생이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이승훈 선생이 체포 구금되자 독립운동의 본거지라 하여 끝내는 불태워졌다.

 

고려대학교와 무궁화 기둥


고려대학교 본관은 1934년 준공되어 현재 사적 285호로 지정되었다.


본관 정문에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것은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의 정문이 있었다.

전면에는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고 후문에는 무궁화조각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건축가인 박동진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전면에 있는 고려대의 상징인 호랑이는

그냥 넘어 갔지만, 무궁화는 문제가 되었다.


당시 박동진은 무궁화가 아닌 벚꽃이라 속여

아직까지 그 돌기둥이 남아있다고 한다.

 

근화여학교와 무궁화 교복


1920년 차미리사 여사가 설립한 근화여학교의 교복은


무궁화의 푸른 잎과 보랏빛 꽃을 상징적으로 디자인한

초록색 바탕에 보랏빛 줄무늬가 있는 치마였다.

학교의 이름 또한 근화(槿花)여서 일제의 탄압이 심하였다고 한다.

이 학교는 1938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하였고

현재의 덕성여중, 덕성여고가 되었다. 글쓴이/管韻


'생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길목에 특별하게 보이는 식물 8/20  (0) 2019.08.20
태극기를 실내로  (0) 2019.08.15
광복절,태극기  (0) 2019.08.15
매미  (0) 2019.08.04
빨래와 소나기와 숨바꼭질 놀이  (0) 2019.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