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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독립문은 사적 32호(2014.2.5) 본문

서울

독립문은 사적 32호(2014.2.5)

복담이 2014. 2. 7. 15:31

 

 

史跡 32호 독립문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오늘은 독립문역에서 내렸습니다.

입춘이 어제였지만 매우춥습니다.

장갑을 벗고 사진을 넣으려니..에휴! 손이시려워요~ㅠㅜ..

언제 시간이 되면 이곳을 걸어봐야지~

늘 마음속으로 생각을 하곤했는데여..

하필이면 추운 날에 오게되었습니다.

이대 후문으로 가려면 고가 아래에서

우측 방향 신촌을 가는 버스를 타야하니까여.

그냥 걷는것 보다는

사진을 찍으면서 걸으니까여..걸을만합니다.

 

 

 

 

 

 

 햇살아래 까치들이 모여있습니다.

따뜻한 곳을 잘 알고 있는듯 해여..ㅎㅎ

 

 

 

 

 

 최초 독립신문을 발간하신 분

송재 서재필 박사님의 동상

 

 

 지나가는 학생한테 부탁을 했더니

정말 사진을 잘 넣어주었네여~^^

감사감사!

 

 

 

독립문 사적 제32호. 1896년(건양 1) 독립협회(獨立協會)가 한국의 영구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청(淸)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숭례문 남대문앞 숭례문 숭례문 중명전 중명전 서울유형문화재 제53호. 대지

 

 

 

 

 

 

 






독립문의 유래 옮겨옴 


 

▲ 1897년 건립당시 독립문 ~~

    ♡ 독립문의 의미 ♡

    서울 서대문에는 독립문(獨立門)이 있어요 그런데 이 독립문은 어느나라에서 독립하였기에 독립문을 세웠을까요? 일본일까요? 아니면 중국 일까요? 독립문이라 하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36년간 식민지로 살았기에 일본으로 부터 독립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독립문은 중국으로 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 하고 있어요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명나라 사신을 그리고 말기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이 있었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지요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지요 중국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극심한 사대주의 즉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마치 중국의 한족은 우월한 민족이고 우리민족은 변방에 있는 하찮은 소수민족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뒤 노골적으로 형제의 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를 종용하였고 과도한 조공과 책봉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2번씩이나 침략하였어요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명나라를 그리워 했지요 주자학파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죽으면서 까지 명나라를 신봉하는 유언을 남김으로 그를 따르는 전국의 유림들은 멸망하여 없어진 중국 명나라의 왕(의종)을 추모하며 제사지내는 웃지못할일도 있었지요 그것이 이른바 속리산 화양서원의 만동묘(萬東廟) 이지요 아무튼 중국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조선말기 19세기까지 이어졌지요 그러면서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어요 이때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더욱 청나라를 배척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 왔어요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1896년1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에 11월에 완공되었어요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 이지요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어요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장식되었지요 앞쪽의 기둥 두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 남은 부분이지요 독립문의 준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요 당시 독립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홀로(獨) 선다(立)는 뜻으로 독립문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지요 당시 중국의 명나라도 조공과 책봉을 요구 했지만 청나라는 더욱 심했지요 과도한 조공과 군신관계 병자호란으로 인한 세자볼모등 그 패악이 극에 달했으며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도 서서히 음흉한 흉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러시아 또한 믿을 족속이 못되었지요 그래서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의 주도로 독립문 건립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지요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어요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897년10월에는 역사적인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지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첫번째 상징적인 문이 되었어요 때문에 최초로 우리나라 태극기가 새겨진 곳이 독립문이지요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이지요 3.1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 경성 사람들은 독립문에 가서 거기 있는 태극기를 보고 그려서 사용하였어요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은 헐려지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독립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에는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포함되는 독립이었으며 이런의미로 고종황제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지요 1637년 음력 1월30일 청태종은 9층의 계단으로 된 수항단 장막과 일산(日傘)을 펼쳐놓고 용상(龍床)위에 떡 버티고 앉아있고 단상아래 인조(仁祖)는 청태종을 행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즉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올리며 항복 했지요 이 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은 고초를 겪었으며 10명중 1명꼴로 청나라에 노예처럼 끌려가 수많은 학대와 멸시를 당했으며 이때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 불렀지요 이때의 수모를 우리민족은 절대로 잊을수도 잊어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면 만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지 않고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병자호란 정묘호란이 일아나지 않을수도 있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하지요 힘없고 어리석은 무능한 인조 ... 그 무능함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입었지요 그런데 요즘 그 치욕적인 사대주의 사상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요 요즘의 세계정세가 구한말때와 흡사하게 돌아가고 있지요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변 4강속에 우리의 한반도가 끼어 있어요 북한은 적화야욕에 눈이 어두워 핵무장에 올인하고 있지만 4대열강들은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코리아 패싱"이란 말이 생겨나고 4강들은 우리나라를 배재한체 마음대로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한반도의 생존을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4강들의 정세를 심도있게 살펴보고 이에 대응해야 하지요 과연 우리가 살길은 무엇인가를 ...... 과연 우리 한반도가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 세상은 급변하고 있어요 피로 맺어진 동맹이라 할지라도 자국의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자국 우선주위가 팽배해 지고 있지요 중국과 북한이 그렇고 한국과 미국도 그렇지요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핵을 포기해야만 살길이라고 앞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뒤로는 슬며시 묵인 또는 방조하며 북한을 부추기고 있지요 그들은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이고 친중 친러시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의 진짜 속내는 북한을 그들의 완충지재로 사용하겠다는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사회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자유민주국가 이기 때문에 이를 배타하는 면도 있지만 핵미사일이 자국영토까지 넘본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수 없는 일이지요 실제로 미국은 우리나라 체제전복을 위하여 북한 정권이 남침한 6.25 전쟁때 무려 6만명에 가까운 젊은 병사들을 잃으면서 우리나라를 지켜 주었지요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모든 무기는 러시아에서 제공했고 중국은 총 37개 군단 113개 사단을 참전시켜 약 60만명의 인민군이 인해전술을 펼첬지요 그결과 통일이 눈앞에 다가 왔었지만 중국으로 인해 현재의 휴전선이 고착화 되었고 한반도는 무려 70년간 허리가 잘리는 운명에 이르렀어요 앞으로 전쟁도 불사 하겠다는 한반도의 운명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 남을수 있을까요? 이럴때 어느쪽과 협력하고 어느쪽에 줄을 잘 서야 할까요? 자유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점이 아닐수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거사:조 동렬(일송) *- ▲ 건립 초기의 독립문(왼쪽)과, 헐린 영은문 기초(오른쪽) ...

     

    ▲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게재한 자신의 논평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어요 ...

     

    ▲ 독립문 준공식 초정장, "1897년11월 14일자" ...

     

    ▲ 1907년경의 독립문 안쪽 전경과 우표 ...

     

     

    ▲ 현재의 독립문 모습 ...

     

     

    ; ▲ '독립문' 글씨옆에 태극기가 있고 밑에 대한제국의 문양인 오얏나무가 있음 ...

     

     

     

    ▲ 영은문과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 ...

     

    ▲ 중국 사신들이 묵었던 모화관(慕華館) ...

     

    ▲ 조선의 세자가 중국 사신을 모화관에서 영접하는 모습 ...

     

     

    ▲ 지금은 모화관이 독립관이 되었지요...

     

     

    ▲ 송재 서재필 동상과 독립문 ...

     

     

    ▲ 우리나라 독립문의 모델이 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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