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담
조선시대 왕비를 배출한 가문 본문
아름다운 미모로 세자빈 자리를 꿰찬 순빈 봉씨는 후일 궁녀 소쌍과의 동성애 사건으로 폐출된다. 조선 왕실에서 궁녀들의 '연애'는 금지됐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궁궐에선 왕의 직계 외엔 앓아서도 안됐고 죽어서도 안되며 연애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때로 수백명에까지 이른 궁녀 모두가 왕의 손길(승은)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궁녀들의 연애ㆍ간통사건이 적지 않다. 상대는 때로 종친이었지만 주로는 내시와 별감이었다. 죽음이 두려우나 사랑엔 목마른 궁녀들은 동성애에 빠졌다. 때로는 왕이 외면하는 왕비나 후궁이 궁녀들과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니 세자빈 순빈 봉씨의 동성애 사건이 그러했다.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은 혼례에서 왕비의 패션까지 조선 왕실여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담았다. 고종 비 명성왕후의 수식(머리관)과 원삼(예복)을 보여주는 사진과 혼례 ~~~~~~~~~~~~~~~~~~~~~~~~~~~~~~~~~~~~~~~~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배출한 가문
1. 청주 한씨(淸州 韓氏)
태조비-신의 왕후 한씨
덕종비-소혜 왕후 청주한씨 (인수대비)
예종비-장순 왕후 청주한씨 (한명회딸)
성종비-공예 왕후 청주한씨
인조비 - 인열 왕후 청주 한씨
2.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세조의 정희왕후,
성종의 제헌왕후(폐비), 정현왕후.
중종의 장경왕후, 문정왕후.
3. 여흥 민씨(驪興 閔氏) 태종의 원경왕후, 숙종의 인현왕후,고종의 명성황후. 순종의 순명효왕후
4. 경주 김씨(慶州 金氏)정종의 정안왕후, 숙종의 인원왕후, 영조의 정순왕후
5. 청송 심씨(靑松 沈氏)세종의 소헌왕후, 명종의 인순왕후, 경종의 단의왕후
6. 안동 김씨(安東 金氏)순조의 순원왕후, 헌종의 효헌왕후, 철종의 철인왕후
7. 반남 박씨(潘南 朴氏)
인종의 인성왕후, 선조의 의인왕후
8. 청풍 김씨(淸風 金氏)
현종의 명성왕후, 정조의 효의왕후.
9. 거창 신씨(居昌 愼氏) - 2명
연산군의 부인 신씨, 중종의 단경왕후
10. 안변 한씨(安邊 韓氏) - 태조의 신의왕후
11. 곡산 강씨(谷山 康氏) - 태조의 신덕왕후.
12.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문종의 현덕왕후
13. 여산 송씨(礪山 宋氏) - 단종의 정순왕후
14. 연안 김씨(延安 金氏) - 선조의 인목왕후
15. 문화 유씨(文化 柳氏) - 광해군의 부인 유씨
16. 양주 조씨(楊州 趙氏) -인조의 장열왕후
17. 덕수 장씨(德水 張氏) - 효종의 인선왕후
18. 광산 김씨(光山 金氏) - 숙종의 인경왕후
19. 함종 어씨(咸從 魚氏) - 경종의 선의왕후
20. 달성 서씨(達城 徐氏) - 영조의 정성왕후
21.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헌종의 효정왕후
22. 해평 윤씨(海平 尹氏) - 순종의 순정효황후
조선시대 사후 왕의 칭호를 받은.,9人 추존왕.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왕세자 신분으로 일찍 운명한 덕종,진종,장조 ,익종.
그리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아버지.,원종.
왕으로 추존된 이들은
종묘에 신위가 모셔져서
살아 있을 때 왕위에 오른
왕과 똑같은 예우를 받았다.
추존왕은 생기게 된 이유는
왕위를 이어받는데 있어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한 때문.
조선왕조는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예법을 중요시 여겨 세워진 나라이며,
왕의 아들 만 즉위할 수 있는 적장자원칙.
예를 들어 세자가 일찍 죽었을 경우
그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해야만 하는데,
그러면,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한 대를 걸러
즉위하면 종가혈통 유교이념을 무너뜨리는 것.
하여,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여도,
세자였던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만들면
적장자원칙에 적합한 모양새가 되는 것.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 추존왕이 생겼다.
추존왕릉의 큰 특징은
병권을 상징하는 석물인
무석인이 없다. 즉, 살아서
병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유교이념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목조.
목조대왕비는 평창이씨 효공왕후.
효공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추존 왕비.
익조대왕비.,정숙왕후
도조대왕비.,경순왕후
환조대왕비.,의혜왕후.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지
4년쨰 되던 1394년 12월에 종묘를 기공.
이듬해 9월에 준공 후 개성으로부터 선대 사조
즉 "목조, 익조, 탁조, 환조"의 신주를 한양으로 옮겨
신묘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왕실에서 종묘의 시초
................평창이씨 효공왕후..........
태조 이성계의 고조모이며, 본관은 평창이다.
그녀의 선대는 평창군 출신 백오군 이광의 후손.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이씨 성을 가진 인물이다.
훗날 세종이 왕족과 이씨 성을 가진 이의 혼인을 금지해
역대 조선왕비 중 이씨 성씨를 가진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된 것은 없으며,
조선이 개국된 1392년(태조 1년)에 남편 이안사(李安社)가
목왕(穆王)에 추존되면서 그녀 또한 효비(孝妃)에 추존되었다.
1411년(태종 11년) 남편 목왕이
목조(穆祖)의 묘호를 받게 되면서
그녀도 효공왕후(孝恭王后)에 추봉.
본관은 평창(平昌). 전라북도 전주 출생.
父 천우위장사 이숙(李肅), 母 정씨(鄭氏).
그녀는 목조와 혼인한 뒤 전주에서 살았으나,
전주부윤과 목조의 사이가 나빠져 죽이려 하자
피신하는 남편 이숙을 따라 강릉에 옮겨 살았다.
그 뒤 전주부윤이 사혐을 갚기 위해
강원도안렴사를 자청하여 오자, 피해
배를 타고 함길도 덕원부로 옮겨 살았다.
1394년(태조 3) 추존되어 효비(孝妃)로 봉해졌고,
태종이 다시 존호를 추가해서 효공왕후로 봉해졌다.
아들 6형제를 낳았는데
장남 안천대군(安川大君)어선(於仙),
둘째 안원대군(安原大君)진(珍),
셋째 안풍대군(安豊大君)정(精),
넷째 익조(翼祖 : 추존),
다섯째 안창대군(安昌大君)매불(梅拂),
여섯째 안흥대군(安興大君)구수(球壽).
능은 안릉(安陵)으로 남편 목조의 능인 덕릉(德陵)과 함께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 음력 5월 15일이 제일(祭日).
효공왕후는 태조의 고조모이므로.,조선왕조 산실인 성모(聖母).
종묘 영녕전 내 태실 제1실에 신위를 모시고 있다.
목조대왕(穆祖大王) & 효공왕후 이씨(孝恭王后 李氏)
..............................................................................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시대 근친혼이 성행했다.
신라왕실에서 3~6촌 간 결혼은 다반사.
고려 왕실에서도 63건의 근친혼이 있었다.
고려시대 일반 백성들도
6촌을 넘는 사이면.,통혼.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실.
같은 성씨와는 혼인을 아예 금지시켰다.
세종 재위 때 조선왕실에서는
동성동본은 물론 본관이 달라도
같은 성씨와는 법으로 혼인을 금지.
그리하여, 조선왕조 내에서
이씨(李氏) 성을 가진 왕비는
평창이씨 효공왕후가 유일하다.
<<조선의 역대왕비.>>
태조 : 신의 왕후(안변 한씨), 신덕 왕후(곡산 강씨)
정종 : 정안 왕후(경주 김씨)
태종 : 원경 왕후(여흥 민씨)
세종 : 소헌 왕후(청송 심씨)
문종 : 현덕 왕후(안동 권씨)
단종 : 정순 왕후(여산 송씨)
세조 : 정희 왕후(파평 윤씨)
예종 : 장순 왕후(청주 한씨), 안순 왕후(청주 한씨)
성종 : 공혜 왕후(청주 한씨), 정현 왕후(파평 윤씨)
연산군 : 거창 신씨
중종 : 단경 왕후(거창 신씨), 장경 왕후(파평 윤씨), 문정 왕후(파평 윤씨)
인종 : 인성 왕후(반남 박씨)
명종 : 인순 왕후(청송 심씨)
선조 : 의인 왕후(반남 박씨), 인목 왕후(연안 김씨)
광해군 : 문화 유씨
인조 : 인열 왕후(청주 한씨), 장열 왕후(양주 조씨)
효종 : 인선 왕후(덕수 장씨)
현종 : 명성 왕후(청풍 김씨)
숙종 : 인경 왕후(광산 김씨), 인현 왕후(여흥 민씨), 인원 왕후(경주 김씨)
경종 : 단의 왕후(청송 심씨), 선의 왕후(함종 어씨)
영조 : 정성 왕후(달성 서씨), 정순 왕후(경주 김씨)
정조 : 효의 왕후(청풍 김씨)
순조 : 순원 왕후(안동 김씨)
헌종 : 효현 왕후(안동 김씨), 효정 왕후(남양 홍씨)
철종 : 철인 왕후(안동 김씨)
고종 : 명성 황후(여흥 민씨)
순종 : 순명 왕후(여흥 민씨)
“조선 개국 후 성리학적 유교질서에 따라
국왕은 혼인한 왕비가 죽었을 경우에만 한해
부인을 맞을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다.
하여, 왕비 지위는 고려시대보다 높아졌고
왕비는 신분 상으로 후궁과도 큰 차이가 생겼다.
왕비와 세자빈, 후궁은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있었다.
후궁은 각각 지위에 따라 역할도 다르고
거주하는 곳과 먹는 것에도 차등이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국왕과 더불어 품계가 없었다.
반면
후궁은
1품 빈·귀인,
2품 소의·숙의,
3품 소용·숙용,
4품 소원·숙원으로
지위를 구분하였다.
국왕 사후에도 대비는 궁궐에서 생활했지만
선조 이래 후궁은 3년상 후, 궐밖 사제에서 생활.
왕비는 세 차례에 걸친엄격한 심사과정인 이른바
삼간택(三揀擇)을 통해 결정된 뒤
육례(六禮)라는 복잡한 절차로 이뤄진
가례를 올린 뒤 국모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후궁은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간택을 거쳐 국왕과 가례를 올리거나
궁녀 중에 국왕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이후 사림이 주도하는 조선 후기에는
사대부의 딸인 후궁에게도 삼간택을 적용.
궁궐 내 별궁을 내어주는 등 대우가 높아졌다.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위로는 대비와 같은 왕실어른을 섬기고
아래로는 내외명부를 지도, 궁중의 권위와 질서를 확립.
물론 직접 뽕을 따서 누에를 치는 ‘친잠례’와 같은 주요 의례를 주관.
후궁은 왕비를 도와 의례에 참석하고
제사준비와 손님 접대 등을 담당하였다.
물론 왕비와 후궁에게 공통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해 왕실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왕비는 국모의 자리에서 물러나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예우했는데 때로는
미성년 왕이 즉위하면 수렴청정에 나서기도 했다.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대신해
전권을 휘두른다는 오해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을 하기도 했지만
정치를 독단하는게 아니라 왕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함께 정치를 한다는 의미.
수렴청정이 부정적이었던 견해는
섭정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렴청정은
왕비의 성향과
정치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기도 했지만
조선왕조가 지속할 수 있는
차선책으로 왕조체제 유지가 목적.
조선시대에는 성종부터 고종까지모두 일곱 차례 수렴청정이 있었다.
최초는 성종 때 세조비였던 정희왕후.
왕의 모후가 아닌 왕실의 최고 어른이
수렴청정하는 선례가 이때 만들어졌다.
명종 때 중종비였던 문정왕후는
‘철의 여인’으로 불릴 정도 권력자.
을사사화를 주도해 사림을 탄압한 것.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마무리되는
철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
정조 사후 세도정치 시대였던 19세기에는연이어 어린 왕이 즉위하면서 순조· 헌종· 철종·
고종 4대왕에 걸쳐 수렴청정이 연이어 행해졌다.
특이한 점은 순조비 순원왕후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두 차례나
수렴청정(헌종·철종)을 했다는 것.
헌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철종이
즉위 당시 19세였지만
강화도령(원범)을 지내면서
군왕의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
2대의 걸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확대하는 기반.
조선왕조 역사 상 적잖은 폐단을 남겼다.
아울러 익종비로
고종 때 수렴청정에 나섰던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과 협력해
기존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를 시정하고
왕권 강화와 왕실의 위상 강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시대 왕실 혼례의 큰 특징 중 하나가 간택(揀擇).
임금·왕세자·대군의 배우자를 뽑기 위해 여러 후보자를
궐 안에 모아놓고 왕실 어른들이 나서 선발한.,간택 제도.
간택이 시작되면 전국 사대부가
10세 안팎 규수들의 혼인을 금하는 명령.
이는 좋은 배우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한 조치.
그 나이대 자식을 둔 사대부 집안에서는
딸의 사주와 사조(부·조부·증조부·외조부)의
성명, 이력을 기록한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신고.
세 번의 심사를 거쳐 3명이 추려졌다.
가문 배경과 부덕(婦德)이 선택 기준이었고,
용모와 사주도 중요했으며 이렇게 뽑힌 규수는
왕실 혼례의 마지막 단계인 친영때까지 별궁에 머물며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공부했으며 혼례에는 여러 달에 걸쳐
많은 인원과 의장이 동원되었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입궐했다.
신랑이 간택된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이.,친영.
조선 왕비의 혼인 연령은 전기에 비해후기로 갈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평균 13~15세였던 혼인 나이가
현종비인 명성왕후부터 10~11세.
그럼에도 왕비의 첫 출산 나이는
조선왕조 519년 동안 평균 20세 전후로
일반 백성들보다 전반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가장 어린 나이에 자녀를 출산한 왕비는
16세에 첫 아이를 출산했던.,혜경궁 홍씨.
문조비 신정왕후는
11세에 세자비에 책봉
20세에 첫 아이를 낳았다.
다산의 여왕은 세종비 소헌왕후.18세 초산 후, 20대에 1~2년 터울로
6명의 자녀를 낳았고 7년 뒤 31세부터
다시 임신해 40세까지 4명을 더 낳았다.
왕실 여성들은
모유수유와 양육을
유모와 보모를 통해 해결.
대부분의 왕비들은 30대 초반이면
노산의 위험 때문에 원자를 더 이상
낳지 않는 경향을 통계 상으로 보였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구성원을보필하는 역할은 궁녀가 맡았다.
그들의 의식주뿐 아니라 각종 의례까지
궁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궁궐 내에서 궁녀 조직의 최고 권력자는
처소 별 궁녀 전체를 통솔하는.,제조상궁.
제조상궁은 매달 당상관 이상의 월급을 받았고,
심부름하는 하녀와 옷 짓는 침모까지 배정 받았다.
왕을 보좌하는 상궁은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영향력이 막강하여 정승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왕실 재산 관리 상궁의 권한도 막강.
문자 교육을 받지 못한 대비들 옆에서
문서관리 담당궁녀들도 실세로 활동했다.
왕실 여성들은 조선의 유행을 선도했다.
왕비와 왕세자빈의 스타일은 조선시대에
모든 여성들이 따라하고 싶어했던.,롤 모델.
색조화장은 기생, 궁녀 같은
특수 계층 여성에게 인기였다.
반면, 궁녀를 제외한 왕실의 여성들은
한듯 안한듯 하다 만듯한 화장을 원했다.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피부미인을 선호했다.
미인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 가발이었고
체발을 넣어 머리를 풍성하게 했으며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두른 머리인
첩지머리, 조짐머리 등으로 치장하였다.
<조선시대 50대 명문 가>
http://cafe.daum.net/sansamo2009/Zldw/377?q=~ 게시물 가져온 주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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