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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기황후는 실존 인물 본문

상식

기황후는 실존 인물

복담이 2014. 3. 18. 10:22

 

경국지색(傾國之色)

- 나라를 망하게할 만큼의 뛰어난 미인. 역사적으로 처음 그 표현이 씌였던 인물은 춘추시대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의 미녀스파이 '서시(西施)를 꼽는다. 이어서 한나라때의 왕소군 (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가 이 대열에 들어간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제왕들과 로맨스를 뿌리고는 젊은 나이에 비참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이 말속엔 여인이 나서면 개쪽난다는 여성비하의 속뜻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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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의 4대미녀들.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어째 영 내취향관....)

 

고려의 항복

 

1259년 형인 몽케가 남송 공격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고려의 태자(훗날 원종)가 북경에 머물고 있던 왕자 쿠빌라이를 찾아와 납짝 엎드렸다.

 

"왜...왔니?"

"저...항복좀 하려고 하는데요?"

"어, 어서와"

 

형제들과 몽케이후의 권력투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쿠빌라이는 오랜 적국이었던 고려의 자진 항복에 찢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쩔줄 몰랐다. 고려의 항복은 형제들과의 권력투쟁에 있어서 자신의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명분하나를 획득한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

 

"고려는 당태종의 정병마저도 물리친 위대한 나라인데, 이처럼 스스로 찾아오다니 참으로 반갑소."

 

고려를 고구려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우선 고려를 추켜세우는 것부터 했다.

 

(원나라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쿠빌라이. 세조) 

 

* 송서(宋書와 명사(明史)에 이르길, 고씨 고려(고구려)가 멸망한후 그 땅에서 왕씨 고려(고구려)가 일어났다. 고려는 신라를 패망시켜 선대의 원을 갚았다. - 중국은 고려를 신라의 후예가 아닌 고구려의 연장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 근세에 이르기까지 청, 일본은 조선이란 공식 호칭대신 고려라고 칭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으론 중국은 고려나 조선이 고구려의 후예임을 들어 북경등 동북지역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요구해올 것이 부담스러워 의도적으로 고구려가 아닌 백제와 연결시키려는 행위를 했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책봉문에, "삼한과 백제의 백성을 평안케하라."는 문구를 넣든가, 명나라때 조선왕책봉시 공식호칭이 '삼한백제조선왕'같은 식이었다. 동북공정은 천년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어서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체를 보전해줌과 아울러, 몽고의 풍습과 제도를 강요하지 않겠음을 약속하였다. 결국 고려는 지루한 전쟁을 종식시키고, 국가보존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사실 고려를 침공한 몽고군은 대개 1만 ~ 수천명 정도의 소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몽고병과 맞짱뜬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강화도에 쳐박혀 대장경이나 파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백성들에게 한번 잘 싸워보라고 응원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긴 전쟁중에 민중들의 생활은 말 할수 없이 피폐해졌고, 고려사에 나오듯이 한번에 20만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다. 몽고병들의 습성으로 봐선 끌려간 사람들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겠지만...

 

이 와중에서도 최씨군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정권에만 몰두하여 항복에 적극 반대했을 뿐아니라, 그 잔당들인 '삼별초'들은 제주도까지 거처를 옮기면서 무장투쟁을 거듭했다. 고려사에 나온 기록만 봐도 삼별초는 몽고군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민중들에겐 또다른 재앙이었다.

이들이 하는 짓은 최씨정권의 친위대로서 군벌정권 유지를 위한 재화를 마련할 목적으로 백성들로부터 무차별 약탈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고려민중들에게 있어서 삼별초는 정권이 기르는 '강도단'과 다를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들을 애국자로 칭송하는 것은 사실 당시의 평과는 큰 차이가 있다.

 

고려가 국체를 보존했다고 해서 단지 평화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의 일본원정준비로 온 나라의 국력이 완전 소모되어 거의 상거지가 되었을 뿐아니라, 동방의 해상무역국가로 명성을 날리던 고려의 대상선단은 몽고의 강압으로 완전 파괴되어 국가의 주요한 수입원이던 대외무역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몽고의 영악한 고려지배의 한 전형이었음은 물론이었다.

 

고려공녀

 

(고려출신 원제국의 마지막 황후. 기황후(奇皇后). 그동안 역사적으로(元史, 高麗史등) 희대의 악녀로 묘사되었다.)

(奇씨 문중에선 최근에야 영정을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에 대해 몽고는 매년 일정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해왔다. 그 목록중에는 환관과 공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의심이 많은 몽고인들은 국가의 주요한 부서에 한족(漢族)을 기용하는 것을 꺼렸다.

심지언 부억칼조차도 10집에 한개꼴로 소유하도록 감시했으며, 결혼을 앞둔 신부나 처녀들은

 몽고 병사들에게 자신의 처녀나 초야권을 바쳐야했었다.

한마디로 인종개량을 하려했던 것이다.

 

따라서 대도(大都)의 황궁은 비한족인들로 채워야 했는데, 특히 고려인들이 인기가 높았다.

1274년(원종 15년) 140명을 시작으로 연평균 40,50명 정도가 몽고관리들의 일방적 착출을 통해서 강제로 끌려갔다.

그들은 재수가 좋으면 궁녀가 되거나, 귀족의 첩실로 들어앉을 수 있었으나,

대개는 노리개가 되거나 잡부로 한많은 인생을 마쳐야했다. 특히 공녀를 선출하는 권한은 몽고관리에게 전적으로 주어져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무집이나 들이닥쳐서 끌고 갔는데, 개중엔 왕족이나 정승급의 귀족집안 여자까지 있었다. 심지어 태자의 애인이었던 왕족의 딸까지 징발되자 태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해서 겨우 풀려난 경우도 있었으며, 좌정승(부총리급)이었던 홍규는 눈앞에서 끌려가는 딸을 구해보고자 노력하다가 집안이 망하는 사태까지 당했다. 최고위 직에 있던 자들의 상황이 이러하니 일반 백성들은 어떠했을진 뻔하다.

- 앞서 올린 '한민족의 뿌리'란 글에서 고려주둔 몽고병사가 정승집안에 찾아가 집안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었다.

 

이런 와중에 고려귀족의 딸로서 공녀로 끌려간 여성이 있었다. 훗날 기황후(奇皇后)라 불린 원나라 마지막 황후가 된 여자였다.

당시의 원나라 황제는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였다. 그는 어려서 원나라 권력투쟁의 여파로 고려에 귀양조치되어 살았었다. 그러나 곧 순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득세하면서 고려에 살던 그는 대도로 금의환향하여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황실의 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있었던 이 황제는 어린시절 고려의 추억에 빠져 황궁의 궁녀였던 기씨(奇氏)를 후궁으로 맞아 들였다.

 

원황실을 장악한 고려의 여인과 환관들

 

영악한 기씨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고 유례가 없는 제2황후에 올랐다. 당시의 황궁은 고려출신 궁녀와 환관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고려출신 환관들(고용보, 박불화등)과 죽이 맞은 기황후는 황실의 권력투쟁을 거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제1황후를 독살한 끝에 마침내 정실황후가 되었다.

 

이후 원 황실은 기황후를 중심으로 박불화일당이 인의 장막을 친채, 황제를 점차 허수아비로 만들어가면서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국정에 관심없게 만들기위해 고려에서 미인들을 뽑아와서 그녀들에게 빠져살게했다. 황제의 하루일과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대화가 통하는 고려후궁들과의 목욕이었다. 그는 늘 불평했다.

 

"황제의 업무란 정말 힘들다."

 

권력을 장악한 기황후 일당의 가렴주구는 점자 도를 높여갔다. 대도에서의 모든 인사는 그녀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서 가능했다. 원나라의 권문세도가들은 그녀의 눈에 들기위해 노력했다. 대개 고려여인을 제2부인으로 맞아들였고, 고려복식을 하고 다녔으며, 고려음식을 먹고, 모임에선 고려에서 최신 유행하는 개그로 썰을 풀기도 했다. 고려풍속과 언어의 유행은 온 대도를 휩쓸었고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하였다. 일종의 한류의 원조였던 셈이다.

 

당시 황실엔 고려에서 볼모로 와있던 공민왕(당시 왕자)이 있었다. 징스스칸이 외조부인 그는 당당한 몽고황실의 일원으로 대접받고 있었으며, 황궁시위대장(경호실장)의 직잭을 맡고 있었다. 그는 기황후 일당과 함께 '고려 마피아'를 형성했다. 원의 대신들은 이들의 방해로 황제에게 접근하는것 조차 힘들었다. 또한 국가의 모든 결정은 황명을 빙자한 기황후일당의 의중으로 결정되다시피 했다.

* 고려의 역대 왕들은 징기스칸의 외손자격으로 원황실 후계자 선정회의에 참석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특히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후계구도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자신이 지목한 황제를 옹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몽고족의 힘은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대원제국의 질서는 곧 몽고의 군사력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보통 몽고군의 핵심적인 지휘관이라 불리는 '천부장'이 휘하의 병력들을 개별적으로 유지하다가 대규모 전투시에는 이들의 연합부대를 편성하는 게 몽고군의 기본적인 형태였다.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위해 정부는 은광과 염전을 개발하여 경제적 뒷받침을 하였다.

그러나 순제당시에는 은광이 바닥나고, 염전의 소금은 상당수가 빼돌려지기 일쑤였다. 중앙정부의 가렴주구는 극심해서 몽고군들의 경영이 힘들어 지게되자, 고위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착취하여 이익들 보는 경우가 많았다. 부하들은 지휘관들이 요구하는 상납금을 채우기위해 백성들(한족)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중앙정부의 부정부패는 극심하였고, 결국 도처에서 반란이 만연하여도 중앙정부는 군대를 움직일 돈이 없어서 구경만하는 꼴이 되었다.

황실에 있었던 공민왕은 이러한 원나라의 사정을 세세히 파악할 수 있었고, 더이상 몽고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고려에 돌아가서 왕위에 오르자 정동행성이란 기관을 통해 고려에 갖은 간섭을 하던 몽고관리들을 패죽이고 관청을 폐지하였다.

이어서 누이(기황후)의 지위를 믿고 고려의 왕처럼 행세하던 기씨일파를 역모로 몰아서 죽였다. 당시 원나라는 도적떼 두령이던 주원장이 금릉(오늘날 남경)을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치고 있어서 정신이 없던 때였다. 또한 원나라에 매년 바쳐야했던 공녀도 폐지하고 독자적인 노선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공민왕 부부의 초상. 왼쪽이 공민왕과 세기의 로맨스를 남긴 노국공주)

 

얼마후 원나라에서 고려로 공문이 왔다.

 

"무도한 고려왕을 문책하러 곧 70만 대군을 동원하겠다."

 

친정이 쑥밭이 되버린 기황후가 분노해서 공민왕에게 물러날 것과 대도로 와서 처벌을 받으란 협박이었다. 그러나 원나라 내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던 공민왕은 코웃음쳤다.

 

"오랑캐들은 싸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할 껄"

* 오랑캐 - 원어로 오량카이. 몽고를 통일한 징기스칸은 개별 부족들로 병사를 조직해 아들들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중에 타타르와 오랑캐부족이 유명하다. 타타르부족은 주로 동유럽을 원정하였고, 지금도 러시아에 타타르 공화국이 남아있다. 오랑캐부족은 주로 한국과 이라크등 아랍을 침공하였다. 따라서 침략당한 국가마다 몽고에 대한 명칭이 부족별로 다르다. 동유럽에선 타타르라 부르고, 우린 오랑캐라 불렀다.

 

공민왕을 문책하기위해 압록강을 넘던 소수의 원나라 군대는 고려군에 전멸해버렸다. 그래도 주변에서 좀 달래주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문익점을 특사로 파견했다.

 

"친정의 일은 지방군이 임의로 처리하여 생긴 불행한 사태로 전하께서도 가슴아파 하시고 계십니다요..."

"흥"

 

기황후는 뻔한 노가릴 푸는 문익점을 강남으로 귀양을 보내 버렸다. 그가 10여년간의 귀향살이에 풀려나서 귀국했을 때 목화씨를 숨겨갖고 온 일화는 모두 알 것이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대원제국의 멸망

 

 (명나라를 세운 도적떼의 우두머리출신 주원장. 전해오길 더럽게 못생겼다고 한다.)

 

원의 수도 대도에선 목전의 주원장 패거리를 두고서도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를 황태자로 임명한데이어 순제로부터 양위까지 받으려하자, 볼루르 테무르는 위대한 몽고제국에 고려혈통이 황제로 들어설 수 없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수년간 양측이 치고 받고 싸우는 통에 25만의 주원장부대가 대도에 무혈입성을 하였다.

 

1368년 울고불고하는 기황후를 달래며 혜종(순제)은 보따리를 싸들고 몽고의 고원지대로 떠났다. 국명을 북원(北元)이라 개명하고 중원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1370년 사망했다. 주원장은 싸움도 않고 대도를 물려준 그를 너무 착하다해서 順帝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

 

옛 영화를 잊지 못하던 기황후는 아들을 황제로 옹립시키고 고토회복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몽고는 그후에 국명을 타타르로 고치고 다시 세를 모아서 중원침략을 도모했으나, 명나라 제4대 영락제(永樂帝)에게 패하면서 영원히 꿈을 접어야했다.

 
        곡명 / 回想曲 高腥美 / 노래 등려군 / 중국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