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發明)은 1%의 영감(靈感)과 99%의 노력(努力)이 낳는다.
최무선(崔茂宣-1325~1395-고려 우왕 때의 장군)은 '화약에 미친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었을 정도로 화약제조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우왕 2년(禑王-1374~1388-고려 36대왕)에 원나라 이원(李元)의 도움으로 많
은 정보를 입수 계속 연구 끝에 핵심 기술인 염초 제조법을 개발, 화통, 화포,
화전 등 각종 화약병기를 제조 실험하니 그 성능이 매우 우수하였습니다.
마침내 우왕 6년(1380) 8월에 왜적이 손시제(孫時制)를 우두머리로 왜선 5
백 척을 이끌고 금강유역의 진포(충남 서천군 한산면 신장리)에 닻을 내린 뒤,
큰 밧줄로 배를 서로 묶고 모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이 때 최무선은 1백여 척의 군함을 이끌고 나타나 왜선을 향하여 화약병기로
일제히 '호국의 불'을 뿜어 왜선은 모두 통쾌하게 폭발, 격침시켰습니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입니다.
배를 잃고 쫓기는 왜적들이 서천 신장리에서 익산의 웅포(熊浦)뒤에는 함열
고개라는 재가 있는데 이 고개를 넘어 36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왜적이 전라북도 남원 운봉면 화수리(雲峰面花水里)에 이르자 이성계(李成桂),
이두란(李豆蘭) 두 장군에 의해 격멸 되었습니다.
이것이 황산 대첩(荒山大捷)이며 최무선의 유인으로 인한 전과였습니다.
3년 뒤 왜구는 다시 남해의 관음포에 20여 척(2,500명)을 이끌고 쳐들어 왔
습니다. 최무선은 이번에도 정지(鄭地) 장군을 도와 화약병기로 그 중 17척을
바다에 침몰 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는 <화약수련법>을 지어 화약 제조 비법을 아들 최해산에게 전수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 그러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 이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뜻<志>이 있으면 반드시 성공(成功)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