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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정몽주 선생 이야기 (옮김) 본문

우리역사

정몽주 선생 이야기 (옮김)

복담이 2014. 5. 8. 13:14

 

 



 

                                               대하 드라마  정도전 보기 전에

                                      이해를 돕기위해 이 글을 올렸습니다.

 

 

                           정몽주 선생 이야기 

화창한 봄날 정몽주는 이방원으로부터 한 장의 서한을 받았습니다 . 날씨도 좋으니 자기 집에서 술이나 한잔 나누자는 초청이었습니다 .

이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청할까 .”

정몽주는 요즘 궁중형편으로 보아 생각이 착잡했지만 청하는 데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

어디 가서 경중이나 살펴보자 .”

나들이옷을 갖춰 입은 정몽주는 이방원에게로 향했습니다 .

정몽주를 맞아들이는 이방원 역시 그의 속심을 알아내려는 것이니 본의 아니게 수선을 떨며 술상을 차리고는 반가운 체 하는 것이었습니다 . 심중을 떠본 후 자기 편에 끌어넣으려 하는 속심입니다 .

몇 순배 술이 오가자 이방원이 먼저 시조 한수를 슬그머니 던졌습니다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의 속심을 벌써 넘겨짚은 정몽주가 이에 거침없이 화답했습니다 .

이 몸이 죽어죽어 열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님 향한 일편단심 , 고려 왕권을 지키려는 정몽주의 마음은 드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 이것이 바로 정몽주의 유명한 단심가 입니다 .

 

시조를 마치자 그는 군말 없이 일어서서 이방원의 집을 나섰습니다
. 자기의 생각을 쏟아 놓았으니 더 앉아있은들 무엇하랴 .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는 이처럼 절개 굳은 사나이였습니다 .

 

고려말기의 이름난 유학자이며 또한 고려를 지켜 목숨을 바친 충신인 정몽주는
1337 년 고려 초 시기 문인이었던 정습명의 후손입니다 . 그는 호를 포은이라고 했고 자는 달가였으며 시호는 문충이라 했습니다 .

 

정몽주의 어깨에는 날 때부터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북두칠성처럼 두드러져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합니다
.

 

어린 시절 그의 애칭은 몽란 또는 몽룡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

그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에 흥미를 가지고 뛰어난 재능을 보이었습니다 . 어릴 때 그가 지은 글이 얼마나 신통했던지 마을의 늙은이들은 또 한번 더 지어 보라고 자꾸만 졸라대는 바람에 때로는 해지는 것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정몽주의 글재주와 관련해서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

그가 9 살 되던 해에 외갓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습니다 . 거기에는 일을 보아 주던 여자종이 있었는데 글 잘 짓는 그 앞에서 선뜻 말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정몽주는 여인의 심중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어서 이야기해보라고 따뜻이 말했습니다 .

그러자 그 여인은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데 문안편지를 보내자니 글을 몰라 안타깝다는 것을 슬며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순간 정몽주는 웃음을 지은 후 여인을 안심시켰습니다 . 그리고 글귀를 했습니다 . 그는 곧 글귀를 정하자 번개같이 간단명료한 편지를 써서 여인에게 주었습니다 .

그런데 어인 일인지 여인은 만족스런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

자기 생각 같아서는 그 종이장이 넘쳐나도록 그리운 낭군님께 쓰고 또 써도 모자랄 것 같은데 고작 글자 몇 자에 지나지 않으니 도무지 성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

아이참 , 문안이나 담았을까 .’

여인은 이 심정을 다시 그에게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간절한 심정을 모두 담아 다시 써달라고 간청해댔습니다 .

웃음을 머금은 정몽주는 두말없이 봉했던 봉투를 뜯고 두 줄을 더 썼습니다 .

여인은 편지내용이 제 마음을 담기엔 너무도 적다고 생각했지만 더 어쩔 수 없고 해서 그것을 받아 남편에게 보냈습니다 . 이 편지가 바로 정몽주의 유명한 상사곡 입니다 .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도 기울지만

아내의 마음 변함이 없소이다

봉한 것을 뜯고 다시 한마디 더 씁니다

세상에 병이 많은들

상사병만 하오리까

어린 정몽주는 자기 곁을 떠나서 먼 곳에 거처하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깨끗하고 변함없는 심정을 이렇게 자기의 글귀에 담아 주었던 것입니다 .

이 편지체 문장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세대를 거쳐 오늘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

이렇게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장에 밝았고 사람의 심리를 움직일 줄 알았습니다 .

 

정몽주는
21 살 되던 해에 국자감에서 주최하는 감시에 합격했습니다 .

어머니는 그를 축하하여 예복 한 벌을 만들어주었습니다 . 옷을 받아든 그는 안감으로 붉은 색깔의 천을 댄 것을 보더니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

어머니 , 이 옷의 안을 무슨 이유로 붉은 천으로 넣으셨소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

너도 장차 벼슬길에 나서면 고려왕조를 섬기게 되겠는데 그 길에서는 언제나 일편단심이어야 한다 . 붉은 색깔이란 그런 뜻을 새기고 있으니 너도 한마음 충신으로 살라고 그리하였다 .”

어머님 , 알겠소이다 . 그 길에서 드팀이 없을 줄로 아시오이다 .”

과연 정몽주는 그 마음을 변치 않았습니다 .

 

그는
23 살이 되던 해인 1360 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로부터 벼슬을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항시 그는 어머님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

벼슬이란 결코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고 백성을 잘   살도록 하는 것이 벼슬이다 . 너는 언제나 나라에 충성하고 바른 일을 하며 한마디의 말을 해도 대의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

 

정몽주는 예조정랑
, 성균관박사 , 사성 , 대사성 , 정당문학을 거쳐 중년에 와서는 수문하시중이라는 고려의 최고관직에까지 올랐습니다 .

고려 말 정세가 복잡해지자 정몽주는 어지러워진 봉건통치를 바로 잡고 나라를 일으켜 세워보려고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

 

외적의 침입으로 국경선에서 전란이 그치지 않고 또한 공민왕이 살해된 후 우왕이 왕권에 오르는 등 곡절이 거듭되는데다 임금의 방탕한 생활로 궁궐 안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

이런 때에 정몽주는 적극적으로 일을 벌려나갔습니다 . 그는 먼저 대지주들의 전횡을 막고 고려 왕권을 유지하는데 힘을 돌렸습니다 . 그는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진 지방관리 임명제도를 바로잡아 관리 선발을 돈이나 뇌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력에 따라 엄선하도록 했고 나라의 법을 옳게 세워나가도록 이끌어나갔습니다 .

 

정몽주는 당시 현실로 나타났던 도평의사 녹사가 국왕의 비준도 없이 제 마음대로 국고에 손을 대어 돈과 쌀을 맹탕 출고하던 문란한 제도를 뜯어고치여 경력과 도사라는 직제를 새롭게 내오도록 하고 출납관계를 장부에 명확히 기록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귀한 재산을 사취하는 부정적인 현상을 없이 했으며 언제나 장부를 펼치기만 하면 환하게 적혀있도록 엄한 통제를 했습니다
.

 

정몽주는 의창을 세우도록 조치를 취했고 수참이라는 것도 설치하여 평민들이 편리하게 했으며 운수문제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풀었습니다
.

그는 또한 당시 착잡하게 엉켰던 대외사업을 풀기 위한 외교활동도 적극 벌렸습니다 .

 

1368
년 조정에서는 명나라와 원나라와의 관계문제를 놓고 논쟁이 붙었는데 정몽주는 망해가는 원나라가 아니라 새로 일떠선 명나라와의 친선을 주장했습니다 . 그래서 그는 사신의 임무를 지니고 명나라를 방문하여 걸린 문제들을 풀었던 것입니다 .

망망한 바닷길에 나선 정몽주는 그리운 고향과 어린 두 아들을 생각했습니다 .

백 가지 생각 재처럼 식었으나

마음에 걸리는 건 오직 두 아이

아직 어미 품을 떠나지 못했으나

벌써 옛 사람의 시를 외우네

내 무슨 좋은 일을 쌓았으랴만

이름 남길 건 너희들 둘뿐

다 쇠하여 늙어진 날이 되어야

너희들 어른 된 모습 보겠네

그는 자식들의 장래를 그리면서 나라 위한 사절단의 사업을 목숨을 걸고 맡아나섰습니다 .

 

명나라 태조도 정몽주를 비롯한 일행의 예절 있는 인사와 그들의 높은 품위에 감탄하여 정중하게 대했고 명나라에 유학생들을 보내겠다는 정몽주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

일을 무사히 끝내고 그들이 바닷길에 나서자 그만 파도에 휘말려 표류되는 격난을 당했지만 정몽주는 목숨보다도 나라의 외교문서를 더 중하게 여겼습니다 . 그런데 다행히 조난당한 소식이 왕궁에가 닿아 급히 배를 보내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

 

또한 정몽주는
1377 9 월 왜적을 엄히 단속할 데 대한 사신의 임무를 받고 규슈에 다녀오게 되었는데 이때도 능란한 외교술과 유창한 언변으로 하여 왜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

처음 왜구들은 그를 감금하고 만나기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

이에 격분한 정몽주는 먼저 부드러운 문장으로 도주에게 서신을 냈습니다 .

예로부터 제 집에 오는 사람을 박대하는 자는 하늘의 복을 얻기 어렵다 했습니다 .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 자기 집에 찾아 오는 손님을 박대하는 것이 어찌 인간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 옛날의 어느 한 성인은 도적이 오더라도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맞으라 했다고 합니다 . 하물며 나는 나라 왕의 명으로 귀국에 왔은 즉 어찌 말 한마디 들어봄이 없이   옥에 가둘 수 있습니까 .

말을 못하는 짐승까지도 제 생각이 통해야 같이 살거늘 하물며 말을 하는 인간끼리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다면 무엇으로 인간이라 이르겠습니까

청컨대 나를 맞이하여 우선 귀국에 온 뜻이 무엇인지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글을 받아든 도주는 얼굴을 붉혔습니다 . 과연 옳은 말이었습니다 .

이런 사람을 함부로 대해 가지고는 안 되겠구나 . 학식과 인품이 훌륭한걸 .”

도주는 즉시 영을 내렸습니다 .

옥에 갇힌 고려사신을 이리로 정중히 모셔 들여라 .”

정몽주와 마주 앉은 도주는 더욱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

그 인품은 과연 견줄 데가 바이없었습니다 .

 

도주는 그의 학식에 감탄하여 물었습니다
.

고려에서는 무슨 일을 맡아보고 계십니까

성균관 대사성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

역시 학자님이시군요 . 우리 사람들에게 강의를 좀 해주시오 .”

별로 아는 것이 없지만 요구가 그러시다면 마침 성리학을 연구하고 있던 중인데 그것이나 들려 드리던지 .”

그리하여 정몽주의 강의를 듣기 위해 일본의 각 곳에서 수많은 학자 , 승려들이 모여들었습니다 . 그들은 정몽주에게서 기념으로 시도 한 수씩 써달라고 요구했습니다 . 그때마다 정몽주는 있는 글재간을 내어 그 자리에서 한 수씩 척척 써주었습니다 .

 

정몽주는 국왕이 준 외교문제도 순조롭게 해결했고 이듬해
월에는 붙잡혀갔던 수백 명의 고려사람들까지 구원하여 10 여척의 배에 싣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우왕은 정몽주의 귀국에 너무 기뻐 그의 손을 움켜잡고 놓을 줄 모르면서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

 

그 후 정몽주는 여진징벌 때도 외교관으로 나서서 그들을 감화시켰습니다
.

그는 이처럼 뛰어난 외교술과 인품으로 하여 적 편까지 감동시키는 인물이었습니다 .

 

정몽주는 유학자로서도 이름이 났었는데 역사에서는 조선성리학의 창시자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 당시 그는 저명한 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색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 이들이 성리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 정몽주 편이 더 큰 절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 그는 유학을 보급하기 위하여 개경에 5 부학당 ( 양반자식들이 공부하는 곳 ) 과 지방들에 향교를 설치했습니다 .   그리고 이에 모든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

 

정몽주의 이러저러한 업적들을 놓고 볼 때 그가 역사에 남는 인물로 되는 것은 학자로서보다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이후 그의 정권탈취를 결사반대한 고려왕의 충신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

처음 이성계는 정권에 들어앉자 왕씨들을 멸족시키고 또 최영을 비롯한 반대파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지만 성리학자인 정몽주만은 왕조성립에 써먹으려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

 

그것은 이성계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있었던 것만큼 성리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정몽주의 지지를 받는 것이 왕조성립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정몽주의 완강한 태도는 이성계 일파의 비위를 상하게 했으며 그 일당의 주목되는 대상으로 이르러게 되었습니다 .

처음에 그는 왕의 스승이 되어 정사를 도와 나섰으며 일편단심 왕씨의 조정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

그러나 이때 이성계의 세력이 부당하게도 날로 장성하여 민심이 거기에 쏠리고 또한 간신들과 책략가들이 그 주위에서 맴돌며 그를 내세우려 하는 것을 보자 정몽주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 그리하여 그는 이씨 배척의 앞장에 나섰습니다 .

그런데 이때 명나라에 갔던 왕태자가 돌아오므로 이성계는 이를 마중하러나갔다가 돌아오던 중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는 일이 생겼습니다 .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정몽주는 때를 놓치지 말고 이성계 일파를 내쫓으려 작정했습니다 .

그러나 이때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이 소식을 애비에게 급히 알려 빨리 돌아오도록 하여 일은 글러지고 말았습니다 .

정몽주는 이성계 일당이 장차 거사를 시도하며 준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 동태를 직접 자신이 살펴보기 위해 병문안을 구실로 그의 관저를 방문했습니다 .

이때 이방원은 정몽주가 제 발로 걸어온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타산하고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

이성계와 방원 등 그 일파는 정몽주를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없애버릴 것인가 하고 망설이던 중이었습니다 . 그로 말하면 당대의 이름난 인물로서 백성들의 존경의 대상이기에 함부로 건드리기는 어려웠습니다 .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찾아온 그에게 음식을 권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의 심중을 떠보았습니다 .

그러나 그의 자세는 완강했습니다 .

방원은 최후수단을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

처음 방원은 이지란을 불러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말하기를 정몽주는 아까운 인재이므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다시금 결심을 한 방원은 심복장사 조영규를 불러들였습니다 .

그대는 군기고의 쇠도리깨를 가지고 급히 선지교 근처에 가서 은신하고 있다가 조금 뒤에 정몽주가 그곳을 지날 터이니 불문곡직하고 내달아서 때려죽이고 돌아와 알리도록 하라 .”

정몽주는 이성계와 방원을 작별하고 돌아오면서 그들의 동정을 살펴보니 무사할 것 같지 못하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

그는 깊은 시름에 잠겨 이 나라에 닥쳐올 재난을 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

천 가지 만 가지 잡 시름에 잠겨있노라니 그가 탄 말은 어느새 선지교 근처에 다다랐습니다 . 이상한 예감에 문득 앞을 바라보니 장대한 체구의 한 사나이가 쇠도리깨를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말을 멈추어 서게 하고는 뒤를 따르는 시종에게 조용히 일렀습니다 .

오늘은 웬 일인지 공기가 이상한 것 같구나 . 나는 이미 마음에 정한 바 있으니 구태여 피하지 않으려니와 너는 공연히 화를 당할 까닭이 없으니 속히 이 자리를 피하여라 .”

불상사를 예감한 정몽주는 자기 때문에 그 까지 화를 당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

정몽주의 시종이던 김경조는 공민왕 시기 시중의 벼슬을 지낸 김구주의 아들이었습니다 . 그는 평소에 정몽주의 인격을 존중하여 그를 성심성의로 받들었습니다 .

성질이 강개하고 성실한 그는 이 말에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 그는 정몽주가 아무리 말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

상공께서 변을 당하실 바에는 소인이 어찌 편안히 살기를 도모하리까 모시고 가겠나이다 .”

그러나 정몽주는 어서 피하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말에 올랐습니다 . 그런데 말에 오르며 말머리를 뒤로 가게 하여 거꾸로 타는 것이었습니다 .

이것을 이상히 생각한 김경조가 그 리유를 캐어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당하기 싫어 아까는 술을 많이 마셨고 , 앞으로 달려들어 때리는 것을 보기 싫어서 이제 말을 돌려 타는 것이다

저는 어떤 일이든지 대감님과 같이 하겠나이다 .”

정몽주 일행이 말을 달려 선지교에 당도하니 기다리고 섰던 그 장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달려들어 뒤통수를 쇠도리깨로 내리쳤습니다 .

순간 김경조가 얼른 자기의 몸으로 정몽주를 감싸 안았으므로 그가 먼저 피를 토하고 말에서 떨어졌고 다음에는 정몽주마저 선지교에 넘어졌습니다 .

그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

그때 그의 나이는 56 살이었습니다 .

정몽주가 마지막 길을 간 선지교는 개성시 선죽동 노계천에 놓여있는 크지 않은 돌다리입니다 . 그가 죽은 선지교에는 그날 밤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합니다 . 때문에 다리이름을 선지교란 종전의 이름대신에 선죽교로 고쳤다고 합니다 . 그리고 정몽주가 흘린 붉은 피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 일화는 정몽주의 고려왕조에 대한 우국충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물론 대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통치배들이 충군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 .

화강석으로 된 선죽교는 1216 년 이전에 놓은 것인데 난간은 정몽주의 후손들에 의해   1780 년에 덧붙여 쌓은 것입니다 .

선죽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포은 정몽주를 잊지 않기 위해 표충비 가 세워졌습니다 .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었지만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모든 제왕이 그의 충절에 대하여 높이 찬양해 나섰고 심지어 이방원까지도 뒷날 임금이 된 후 그에게 영의정이라는 명예벼슬을 주고
문충 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

정몽주의 충의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 는 봉건 유교적 충군사상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임금에 대한 그의 충의는 강의한 정신 , 양심과 의리를 지켜낸 인간의 고상한 정신적 면모를 보여준 것으로 하여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고려왕조에 대해서 끝까지 의를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순절한 정몽주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