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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20세기 한국의 충견이야기 본문

감동글

20세기 한국의 충견이야기

복담이 2013. 3. 26. 16:52

글 주신 이 : 고바우 鄭興基님/宣潭 강태식님)

 


20세기 한국의 충견이야기

충견이란 단어엔 두 뜻이 있다. 하나는 물론 주인에 충성스러운(faithful) 진짜 ‘개’다. 다른 하나는 상전한테 벌벌 기며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이를 영어로는 ‘running dog’이라 한다. “뛰어!” 명령하면 앞만 보고 달리는 개의 습성에서 그 표현이 생겼을 것이다. 일제의 앞잡이로 뛴 사람, 한국전쟁 중 적 치하에서 “가증스레 날뛰던 괴뢰의 앞잡이들”이 바로 그 ‘충견’에 비유됐다. “지조 없이 이리 붙고 저리 아양 떨던 자들”을 멸시하는 표현인데 충직한 개의 입장에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겠다.

 

나쁜 의미로 통용되던 ‘충견’, 이 사연을 계기로..

 

산야 헤맨지 6년만에 다시 찾아온 ‘충견’
1955. 12.17 [동아일보] 3면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우리는 몹쓸 ‘인간 충견’을 많이 겪었다. 사는 게 무섭고 팍팍한 시절이라 ‘개보다 못한 이’가 많았고 진짜 개 이야기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던 55년, “전란 때 6년이나 헤어져있던 주인 품을 찾아온” 개 이야기가 전해져 감동을 안겼다. 화제의 견공은 당 7세의 영국산 포인터. 양구의 임 승호 씨가 2살 때부터 키웠다. 임 씨는 50년 6.25가 터지자 식구들과 부랴부랴 피난을 떠나느라 미처 개까지 챙기지 못했다. 수복 이후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완전히 파괴돼 다른 곳에 거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개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 씨가 양구 읍내를 지나던 중 ‘어떤 개’가 “반가운 듯 꼬리를 치며 쏜살같이 달려드는 게” 아닌가. 처음엔 “개의 모양이 병들고 부스스해 보여 피했는데 계속 꼬리를 치며 달려드는 것이 이상해” 자세히 살펴보니 피난 갈 때 놓고 간 바로 그 포인터였다. 개는 머리와 네발 여기저기에 긁히고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이로 미루어 임 씨는 ‘뼈대 있는’ 이 개가 다른 집에 얹혀살지 않고 야산에서 혼자 지내며 오로지 옛 가족을 찾아 헤맨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이 ‘기특한 개의 사연’을 신문사에 제보했고 신문사는 모처럼 사회면 배꼽 화제기사로 처리하며 사진까지 실었다.

 

주인 살려낸 라츠, 표창장까지 받아

주인 구한 충견 라츠에 표창과 꽃다발
1963. 5.6 [동아일보] 7면

전란으로 가족과 생이별하고 눈물로 지새던 숱한 이산가족들은 6년이나 걸려 식구를 찾아 돌아온 충견 이야기에 뭉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운이 가실만하던 63년. 이번에는 산중에서 총상을 입고 신음하는 주인을 구해낸 개 이야기가 사람들을 또 한 번 감동시켰다. 한 일이 워낙 장해 새싹회로부터 표창까지 받은 이 충견의 이름은 ‘라츠’. 태어난 지 겨우 열한 달 된 셰퍼드였다. 그는 “독일 우수 견공 챔피언 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한 ‘페어 폰 베어스타펜’군과 ‘예리 폰 브라이킨멜하우스’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명문가 출신. 덩치가 우람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개였다.

라츠가 주인을 살려낸 대활약상은 그해 2월28일 펼쳐졌다. 경기도 광주의 개 훈련장에서 명견 훈련을 받던 라츠를 주인 아들 유군(17)이 꿩 사냥에 데리고 나간 것. 그런데 산골짝을 누비고 다니던 유군이 발을 헛디뎌 계곡 아래로 미끄러졌고, 그 바람에 산탄총이 발사돼 유군은 얼굴과 발 등 8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것만 해도 넋이 나갈 일인데 오발탄까지 맞았으니 유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때부터 라츠는 유 군을 살리기 위해 매우 명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km가량 떨어진 동네로 단숨에 달려가 컹컹 짖어대며 동네 소년들 바지자락을 물고 끌었다. 영문을 모르는 소년들이 따라나섰지만 산세가 깊은 데 이르러 돌아가려고 하자 앞을 막아서며 짖고, 또 바지를 물고 끌기를 계속했다. 처음엔 호기심이 발동했던 소년들도 덩치 큰 개가 계속 짖고 끌며 당기자 나중엔 무서움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되돌아가려고 하면 컹컹 짖고 이빨을 드러내는 통에 꼼짝없이 산속으로 개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끌고 당기기를 한 시간 여. 계곡 깊은 곳에 다다르자 유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더 이상은 얘기할 필요도 없겠다.

라츠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겼다. 이제 열한 달이라니, “한 살도 안 된 ‘갓난쟁이’가 17세 소년을 산중조난 죽음의 위험에서 구출해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라츠는 사람들을 끌고 조난현장에 가면서 사람들이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바지자락을 물고 끌어당기지” 않았던가. 이러니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라츠 얘기는 서울 장안에선 “그걸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4월초, 새싹회는 “5월 어린이날 행사 때 많은 어린이 입회하에 라츠에게 표창장과 꽃다발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5월5일. 덕수궁에서는 어린이 대표들이 라츠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의로운 개’ 메달도 증정했다. 여러 회사와 단체에서 보낸 각종 선물도 라츠 앞에 푸짐하게 쌓였다. 행사장에는 라츠 덕에 생명을 건진 유군이 병원치료를 받고 완쾌한 모습으로 함께 나왔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조난당해 구조되기까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새싹회는 ‘충견 라츠’를 주제로 하는 동화도 공모했다. 한 달여 동안 무려 103편이나 공모, ‘산골짜기의 라츠’라는 제목의 가작이 나왔다.

 

군 작전서 ‘맹활약’ 장렬히 전사한 충견들

거리 떠돌던 강아지 ‘복구’, 대인지뢰 터트리고 전사
1967. 5.16 [동아일보] 7면

한국인 목숨을 구한 충견의 활약은 국내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멀리 베트남에서도 이어졌다. 이번엔 한국군 맹호부대 수색대원 앞에서 전진하다 부비트랩을 터트려 부대원을 구하고 산화한 ‘복구’(福拘)의 이야기다. 그는 맹호 6중대 3소대원들의 마스코트였다. 아니, 자신이 바로 3소대원이었다. 그가 군대에 입대한 것은 그전 해인 66년 11월이었다. 베트콩 수색작전을 벌이던 3소대가 빈집 지하 벙커에서 삐쩍 말라 다 죽어가는 개를 발견해 데려왔는데 사실상 그날부로 그는 3소대의 수색 첨병이 됐다.

흰색 바탕에 검은 얼룩이 든 이 개는 영특하기 그지없었다. 부대집합 때는 언제나 중대장, 소대장 등 최선임자의 바로 옆에 서 전속부관처럼 보좌했다. 그러면서도 중대원 모두의 얼굴을 익혔고 특히 3소대장을 잘 따랐다. 소대장 역시 그와 숙식을 함께 하며 정을 쏟았다. 맹호부대에 들어옴으로써 복을 가져왔다고 해 ‘복구’라 이름 붙여졌는데, 과연 그 이름답게 다섯 차례나 지뢰를 발견하고 먼저 터트려 대원들 목숨을 구하는 전공을 세웠다. 67년 2월23일에도 복구는 “3소대장과 함께 점심을 한 뒤” 수색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정글 속에서 소대원들보다 10m 앞서가던 복구가 “꽝 하는 폭음과 함께 펄쩍 뛰어 오르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또 앞으로 내달려 다른 지뢰를 하나 더 터트리고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러니까 “이미 한 발 지뢰를 터트려 상처를 입었지만 코앞에 숨겨진 또 하나의 지뢰를 마저 터트리고 나서야” 임무를 완수한 듯 세상을 뜬 것이다. 소대원들은 충직한 전우의 죽음에 모두 넋을 잃었다. 서둘러 ‘유해를 수습해’ 돌아와 부대 안 묘지에 안장했다. 소대원들은 “자신들 목숨을 지켜주고 산화한 복구에게 군인 신분을 부여할 것”을 상부에 건의했고 두 달 후 맹호부대는 복구에게 ‘명예 일병’을 추서했다.

개에게, 특히 충견에게, 장한 행동은 유전처럼 전해 내려지는 것일까.1990년 3월 강원도 양구의 북한 제4땅굴 수색작업을 하던 육군 제 21사단 수색대의 군견 ‘헌트’가 복구의 전사 때와 비슷한 상황을 맞아 순직했다. 그는 암흑 속 갱도의 앞쪽에서 풍기는 화약 냄새를 맡고 그 위치를 알리기 위해 뛰다 지뢰를 밟아 터트리고 전사했다. 앞서 제1, 제2 땅굴의 발견과 수색작전 중에 십여 명의 장병이 지뢰를 밟아 순직한 일이 있었기에 이번엔 헌트가 투입됐고, 그가 제 몫을 다하고 산화한 덕에 21사단 장병들은 생명의 위험에서 비켜설 수 있었다. 군은 이번에도 충견의 목숨 바친 노고를 잊지 않았다. 헌트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추서했으며 인헌 무공훈장도 주었다. 그리고 그 장한 뜻을 기리기 위해 양구 제 4땅굴 입구에 청동 동상도 세웠다.

 

 

산 넘고 물 건너, 두 주인 섬기지 않은 백구

천리길 달려 옛집 찾아간 진돗개 ‘백구’
1996. 9.10 [경향신문] 25면

개들도 장한 행동은 본받는다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6.25 후 6년 만에 주인을 찾아온 양구 개처럼, 이번엔 주인이 다른 데 팔았으나 탈출해 300 km 떨어진 옛집으로 7개월 걸려 달려온 개 이야기다. 그것도 우리의 진돗개 이야기다. ‘백구’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순수혈통 진돗개다. 그가 네 살이 되던 1993년 3월, 주인은 그를 바다 건너 해남에 데리고 나가 대전사람(대전 번호판 차를 타고 온)에게 팔았다. 노모 병원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사실 개를 사고파는 일이야 으레 있는 일이고 특히 진도에서는 뭐 큰 뉴스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주인도 팔아버린 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7개월이 지난 10월 어느 날 “부엌에서 문을 긁는 소리가 나 나가보니 뼈와 가죽만 남은 삐쩍 마른 개”가 와락 품으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고 말 것도 없었다. 백구였다. 대전서 해남까지 300km,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천리 길을 오직 주인이 사는 옛집만 바라며 달려온 것이다. 충성스럽기로 유명한 진돗개의 본향 진도에서도 이런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진도대교가 생기기 전엔 “해남에 팔려간 개가 헤엄쳐 돌아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돈 적은 있지만 전라도를 벗어나 근 천리 길 먼 곳으로 간 개가 되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소문은 돌고 돌아 이 이야기는 먼 광주까지 전해졌다. 기자들이 달려와 취재해보니 모두 하나같이 사실이었다. 백구는 거의 먹지도 못하고 오로지 남쪽으로 남쪽으로만 하염없이 걸어온 것인지 거의 영양실조 단계였다.

 

진짜 충견들의 의리를 곱씹어보며..

백구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의리 있고 충성스러운 행동과 규범에 목말라있기 때문이다. 백구는 영웅이 되었다. 신문방송이 거의 매일 ‘사람보다 훌륭한 진돗개’ 이야기로 도배를 했다. 어느 재빠른 회사는 “백구가 한번 주인을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듯 우리 회사도 한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으로 모시겠다.”는 광고물도 만들었다. 묘하게도 주인댁이 난치병에 걸려 치료비 마련이 난감한 때 백구가 광고모델로 등장하는 바람에 주인은 백구 덕을 톡톡히 봤다. 거기다 평생 광고모델로 하자는 섭외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백구는 팔려가기 전과 다름없이 주인에 충실하고 밥투정도 않는다. 새끼도 세 마리나 낳았다.

지금쯤 얘기해야할 것 같다. 쓸개 없이 여기저기 붙어 제 잇속이나 챙기며 남을 못살게 구는 사람을 이제 더 이상 무슨 충견이라고 하지 말자. 그냥 ‘주구’(走狗-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개)라고만 해도 될 걸 괜히 진짜 충견을 욕 먹이지 말자는 얘기다. 그렇다. 개보다 못한 인간이 많다는 현실은 참 얼마나 씁쓰름한가


Vienna Boys Choir - soundsof spring wal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