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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까치설과 우리 설 본문

동요,가곡

까치설과 우리 설

복담이 2012. 4. 6. 03:59





      


▲ 설날과 반달을 작사 작곡하신 윤극영 선생님 ...

    ♣ 까치설과 우리설 ♣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언니 저고리 노랑 저고리 우리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 하시고 우리들의 절받기 좋아 하셔요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아동문화 운동가 윤극영(尹克榮1903∼1988)선생이 작사 작곡한 동요 ‘설날’이지요 지금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흥얼거리는 명절 노래가 되었어요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매년 신정(양력 1월 1일)이 되면 학생들을 등교시킨뒤 일본 노래인 ‘식가(式歌)’를 부르게 하면서 한 해를 시작했지요 일본이 신정 쇠기를 강압한 데에는 배경이 있었어요 19세기 후반 일본은 메이지 유신 체제하에서 그들 전통의 음력 5대명절을 폐지하고 일왕 생일인 천장절(4월 29일), 1월 1일 원단(신정), 2월 11일 기원절이라 하여 양력 삼대절(三大節)을 도입함으로써 일왕 중심의 근대화에 주력(主力)하였지요 그러면서 일왕 숭배를 위해 기념력까지 바꾸어 이를 식민지 조선에도 도입해 황국신민화를 꾀했어요 그러나 일제가 구습으로 격하시켜 지키지 못하게 했지만 한국인들은 전통 설 명절을 버리지 않았지요 설명절 쇠는것을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지키는 이들도 많았어요 100년전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달전인 설날(양력 2월 1일)에도 한국인들은 차례상 차리는 것을 잊지 않았지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조차 “세배를 다니는 어른과 아이들로 전차마다 가득하다” 고 (1919년 2월 2일)자에 보도하기도 했어요 입춘(立春) 절기 즈음에 맞이하는 설날은 정서적으로나 생체리듬적으로 새로움을 맞이하는 명절감을 느끼게 하지요 물론 양력 1월 1일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새해 첫날로서의 의미가 크지만 오랜 전통과 관습은 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8·15광복후 해방된 남북한 정부도 각기 음·양력설을 하나로 통일하려 무던히 애썼지만 실패했어요 이제는 양력 1일 1일과 설날을 이중과세의 잣대로 보기보다는 신구(新舊)의 음양의 조화로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단, 차례상 차리는것은 집안마다 가정마다 자율에 맡기고 있지요 북한은 봉건잔재라 하여 전래명절을 말살하고 양력 1월1일만 설명절로 지내오다 추석은 1988년에, 음력설은 1989년에 부활했어요 그러나 이마저도 2월16일 광명성절(김정일생일)에 밀려 명절다운 분위기가 없지요 그러다보니 북한의 30·40대는 음력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설날"이라는 동요에 ‘까치설날’은 섣달 그믐날이고 우리의 설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라는 이 노랫말은 전통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을 자아내는 이상적인 의미가 있어요 윤극영이 일제의 일방적인 신정 강요에 반발해 지은 ‘설날’을 흥얼거리며 민중은 설을 더욱 소중한 전통으로 여기게 되었지요 일본순사는 어린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틀어막아도 소용없었어요 윤극영 선생이 1924년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100년 가까이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동요로 설날을 맞는 아이들의 설레고 기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노래밖에 없던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어둠의 시대 속에서도 새날의 희망을 염원하며 만들었는데 이 동요속에 나오는 까치는 일제 암흑 속에 갇힌 대한민국을 해방시키는 존재로 해석돼 우리에게 의미 있는 동물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그런데 왜 설날에 까치를 등장 시켰을까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많은 설이 있지만 예로부터 '까치가 깍깍 울면 날씨가 맑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까치는 날씨를 잘 알아맞히는 영물(靈物) 이었지요 노아의 방주나 신화 속에서도 까치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설날이 맑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지요 그리고 까치는 겨울에 집을 짓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설날 전에 집을 다 짓고 새해를 맞이하지요 그래서 까치처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까치설날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설도 있어요 그러나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신뢰성 있는 이야기는 까치의 습성중에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는데 다른 자들이 이 영역에 침입하면 경계를 하며 '깍깍' 하고 울어대지요 그래서 까치가 어떤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 그 곳을 지키기 위해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면 깍깍하고 울어대지요 마치 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처럼 ~~ 이를 보고 사람들은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했으며 까치를 길조로 여기게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즉, 설 전날에는 반가운 손님이 많이 오기 때문에 까치가 깍깍 많이 울었기 때문에 까치 설날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또 반대로 설날 전날에는 반가운 가족, 친척들이 많이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까치 설날이라고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어요 어찌되었든 작사를 하신 윤극영 선생의 뜻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지금은 타계 하시어 물어 볼수도 없는 실정 이지요 그런데 이 설날 노래말고도 윤국영 선생이 작곡하신 유명한 동요가 또 있지요 바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반달"이라는 동요이지요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1924년 10월 20일 동아일보에 윤극영이라는 21세 청년이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반달'이라는 동요가 발표됐어요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23년 9월 도쿄를 강타한 관동대지진때 처참한 조선인 대학살이 있었지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귀국했지만 시집간 누이의 사망 소식에 또 한번 눈물지으며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반달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외롭게 뜬 달을 보니 누이 잃은 슬픔과 우리 민족의 서글픈 운명까지 겹처 눈물이 핑 돌았고 그 순간 노랫말과 곡조가 떠올랐다고 하지요 재빨리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서둘러 오선지를 찾아 노래를 완성했어요 이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이자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가장 사랑받고 있는 민족동요 '반달'이지요 '동요'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것도 이때부터이지요 이 노래가 발표되자마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여노소 누구나 부르기 시작 했어요 당시 학교에서는 우리말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반달'은 워낙 호응이 컸던데다 일본인들까지 따라 부르는 바람에 일제 당국도 금지를 하지 못했다고 하지요 그러다 보니 이 노래는 일본과 만주까지 전파되어 애창 되었다고 하네요 또한, 윤극영 선생은 소파 방정환, 조재호, 손진태 등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색동회"를 만들어 활동을 시작 했으며 '어린이날' 제정에도 참여했고 아이들에게 우리 말과 노래를 찾아주려고 많은 동요를 작곡해 보급하는데 힘썼다고 하지요 처절한 압박과 설음속에서도 굳건히 창작동요를 쓰고 거기에 노랫말을 입혔던 故 윤극영 선생!! 암울했던 일제 시절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풀어주고 어린이에게는 우리의 꿈과 풍속을 전하며 큰 위안을 주었어요 설날을 맞아 우린 윤극영 선생의 위대한 업적(業績)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이번설에도 만복(萬福)과 함께 소원성취(所願成就) 하세요 -* 언제나 변함없는 일송처사 *-








    ▲ 작곡가 윤극영 선생 부부와 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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