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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나하나 꽃피여 / 조동화 본문

명시

나하나 꽃피여 / 조동화

복담이 2020. 5. 10. 17:02

 

 

 

 

 

 

1) 나 하나 꽃피어  / 조동화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2) 낙동강  / 조동화

 

1

  어린 시절 나는 엄마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낙동강을 보았다.

  동백기름 냄새 향긋한 엄마의 어깨 너머 멀리 아득히 보이던 비취빛 강물

 그러나 미처 그것이 강인 줄을 모르고,

  하늘이 제 많은 자락 중에 유독 짙푸른 한 자락을 내려,

  산과 산 사이로 천천히 끌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2

 강을 사이에 두고 숨 가쁜 전쟁이 오가던 그 여름,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셨지 강을 건너서 마른 황토黃土,

 먼지 이는 산굽이 길을 뚜벅뚜벅 아버지는 멀어져 가셨지

 

3

  학교가 파하고 나면 나는 홀로 강둑에 앉아 종무소식終無消息

  아버지를 그리며 종이배를 접어 띄우곤 하였다

 물결을 따라 물결 앞세우고 따라갈 수 없는 먼 곳으로

 남실남실 사라져 가던 하얀 종이배

 아버지는 보셨는지 몰라, 그리움을 실어,

내 소년을 실어 날마다 띄워 보낸 그 많은 종이배를 

 

4

  깊은 밤 어머니는 곧잘 강으로 가셨다

 아버지는 마지막 뒷모습을 보셨던 것일까,

 달빛에 젖어 빛나던 어머니의 눈물,

꼭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실 것만 같은 예감에

 몰래 어머니의 뒤를 밟아온 나는 또

 한 소리  없이 울었다 무성한 갈대숲에 몸을 숨긴 채

 

5

  오래 응석받이 손주의 든든한 울이셨던 할아버지,

  당신께서는 生前에 즐겨 자주 난을 치셨지

 눈부신 화선지 위에 늘 알맞게 휘어져 있던 묵란墨蘭 이파리,

 이제 나는 알겠네 흰 달빛 아래 아득한 모래벌이

 한 장 화선지로 깔리는 이 밤, 비로소 고개 끄덕이며 알아보겠네

 먼 산굽이 휘어져 돌아가는 묵란 이파리 하나,

한평생 휘어지고 또 휘어져서 마침내

 아주 강물 위에 포개진 할아버지 그 묵란을

 

6

   아침나절, 나는 어린것의 손을 잡고 산 위에 올라 낙동강을 보았다

 첩첩한 산기슭을 돌고 돌아서 아스라이 굽이치는 순은純銀

 먼 강물. 흰 두루막 입은 할아버지 뒤를

소복素服한 어머니도 따라가고 있었다

오오, 얼마나 아프고 소중한 인연因緣의 모습!

  나는 문득 어린것을 무동 태우고 오래오래 먼 강물 가리켜 보였다

 

 

 

 

 

3) 참깨꽃  / 조동화

 

보리를 걷어내고

그루터기에 바로 참깨를 심었다

씨앗이 눈을 뜨면

잡초들도 일제히 함께 올라와

한눈만 팔아도 벌써 풀밭이었지

할매와 나는 둘이서

뙤약볕 쏟아지는 여름 한철을

온통 밭에서 살았다

바랭이, 쇠비름, 방동사니 들을 뽑으며

긴 긴 실꾸리처럼 풀리는

할매의 서러운 내력을 따라가다 보면

칠월은 금방 하순으로 접어들어

어느새 내 무릎만큼의 높이로

황토밭 가득 일던 하얀 참깨꽃

때맞춰 온갖 벌들도 날아들어

산밭은 온종일 잔칫집만 같았지

바람에 쓰러지지 말라고

뿌리께에 수북이 북을 돋우시며

참깨꽃이 참 사랑스럽다던 할매

그때는 미처 몰랐다

할매의 작은 행복도

고달프기만 하던 농사일도

돌아보면 이렇게 모두 그리움일 줄을 

 

 

 

 

 

4) 내력來歷  / 조동화

황톳길

 

반공일 저녁 무렵이면 고향집에 닿았다가

이튿날 바로 쌀자루 등에 지고 먼 도시로 떠나올 때면,

할매는 언제나 동구 밖까지 날 바래다주셨네

버스 타는 큰길까지 빤한 산굽이라 해도 타박타박 걷노라면 마딘 황톳길,

내 다시 들르기까지는 오두마니 그 많은 적막 홀로 지키실 당신이

못내 마음에 걸려 오다간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할 제,

멀어져가는 손자의 뒷모습을 지켜 오래 묵은 동구나무 곁에

그냥 그대로 언제까지나 서 계시던 흰 머리, 흰 무명옷 할매

그런 때 철없는 내게도 목이 메어 북받치는 눈물이었거든,

당신께선 또 얼마나 속으로 가슴 저며 우셨을꼬

어느새 나는 세월의 물살에 휩쓸려 그리운 황톳길에서

너무 멀리 와있고, 당신께선 또 고향보다 더 먼 곳에 계시지만,

지금도 나는 등덜미에 느끼며 걸어가네,

세상에선 날 제일로 아프게 지켜보신 그 눈길

 

 

 

 

 

5) 나무의 정체  / 조동화

 

장작을 태워보고 알았다

나이테는

한 겹 한 겹 쌓인 세월이 아니라

켜켜이 잠재운 불이었음을,

온몸의 잎들을 집열판처럼 펴서

해해연년 봄부터 가을까지

그가 열렬히 흠모한 태양이었음을,

마침내 땅에 묶인 저주를 풀고

하늘 향해 회오리치는

자유의 혼이었음을

장작을 태워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6) 낙화암 / 조동화

 

죽음보다 깊은 적막이 거기 엉겨 있더이다

꽃 피고 꽃 진 자리 꽃대궁만 남아 있듯

강 따라 흘러간 자리 바위 우뚝 섰더이다

 

눈물로 그 많은 피로 얼룩졌던 바위 서려

천년이 흘러가고 또 천년은 흐르는데

몸 가도 넋들은 사무쳐 진달래로 피더이다

 

그날 끊어진 왕조의 단면인양 슬픈 벼랑

다만 함묵으로도 못 다스릴 한이기에

고란사 낡은 쇠북도 피를 쏟아 울더이다

 

 

 

 

 

7) 조화調和의 힘  / 조동화

 

봄이 오면 묵은 나뭇가지에서 일제히 새순이 돋아나

꼬깃꼬깃 접어온 잎들을 펼치며

한 해의 새 가지들을 이룬다

이어서 여름을 지나 가을이 저물 때까지

꽃 피우고 열매 키워 익히느라

하루도 한가한 날이 없는 새 가지들,

낯나는 일과 영광이

모두 그들의 몫임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묵은 가지들이 뒷방늙은이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는 퇴물退物은 아니다

새 가지들의 그늘에 가려 묵묵히 살아가지만

오히려 벽 속에 숨어 건물을 떠받치는 철골들처럼

언제나 보이지 않는 데서

쉴 새 없이 하늘거리는 새 가지들을 든든히 붙잡고 있다

무슨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죽기까지 자식들의 밑거름이 되는 어버이들같이

밤낮으로 깨어 새 가지들을 붙들어주고 있다

 

나무들이 곧잘 거목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8) 관계關係  / 조동화

1

겨울 뜰에 난만한 피라칸사스 한 그루

가까이서 보면 다닥다닥 붙은 열매들이지만

멀찍이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진홍의 꽃떨기다

어쩌다 눈이라도 펑펑 쏟아진 날이면

이것은 또 꽃이라기보다는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2

겨울 들면서 무당새 한 마리

아침이면 어김없이 피라칸사스를 찾아온다

와서는 욕심내지 않고

꼭 붉은 열매 네댓 알씩 쪼아 먹고 간다

 

무당새의 작은 심장을 겨울 내내 뛰게 하고

깃털에 싸인 엄지만한 글 몸을 뜨겁게 달구며

앙증맞은 부리가 쏟아놓는 홍보석들과

창공에 무수히 아롱지는 날갯짓까지

넉넉히 펼쳐내는 변용의 힘,

불가해不可解의 열매여!

 

인간은 한갓 볼거리로 피라칸사스를 뜰에 옮기지만

나무와 새의 보이지 않는 고리는

늘 저렇듯 오묘하게 이어져 있다

 

 

 

 

 

9) 사랑한다는 것  / 조동화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기꺼이 종이 되는 일

 

그리고 또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종이 되고서도

끝끝내 종이 된 줄을 모르는 그 일

 

 

 

 

 

10) 별리別離  / 조동화

 

 바라 볼 만 하거든

개울 하나 두고

 

손 흔들 만 하거든

강물 하나 두고

 

이도저도 안 되거든

바다 하나 두고

 

 

 

 

 

11) 우음偶吟  / 조동화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습니다

하고 싶은 일들 미처 손도 못댔는데

고삐 잡혀 등 떠밀려 끌려왔을 뿐인데

벌써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습니다.

                               

 

 

 

 

12) 고대적古代的 시간  / 조동화

 

날 흐려도

자귀나무 잎 열면

아침밥 때

 

비 내려도

자귀나무 잎 오므리면

저녁밥 때

 

 

 



꽃이 되어 봐요

나도 꽃
너도 꽃
꽃밭을 꾸미고
가꾸는 마음
피어난 꽃속에
향기처럼
허전한 마음
향기롭게 채워가는
서로의 꽃이 되어
가슴속에 따뜻한
사랑꽃 피워요.

20200510/복담


 

꽃이 되어 봐요

 

나도 꽃 

너도 꽃

꽃밭을 꾸미고 가꾸는 마음

피어난 꽃속에 향기처럼

한잎 한잎의 꽃이 되어

허전한 마음

향기롭게 채워가는

 서로의 꽃이 되어

가슴속에 따뜻한 사랑

꽃 피워요.

20200510/복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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