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담
조선시대의 머리모양 본문
조선시대의 머리모양
상투
머리털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삐죽하게 만들고, 거기에 동 곳을꽂아고정시킨 다음 망건을 썼다 망건 앞이마 부분에는 갓을 고정 시키기 위한 풍 잠을 달고 그위에여러가지관모를 썼다,
민 상투
성인 남자가 머리를 위쪽으로 끌어올려 틀어 감은 머리로써 상투를 맨 후에 서민남자는 망건대신 수건을 동이기도 하였다,
땋은 머리(남자)
앞가르마를 타고 곱게 빗어 내리다가 땋아 한 가닥으로 하고, 그 끝에 댕기를 물리는 형식이다총각은 검정색 댕기고 주로 사용하였다.이 땋은 머리의 경우 좋은 일을 당했을 때는 머리를촘촘하게나쁜일을 당했 을 때는 느슨하게 땋는 것이 예의였다고 한다.
바둑판머리
생후 1년쯤 되어 머리숱이 많지 않은 여자아이는 뒤로 묶을 수 없어 짧은 머리숱을 엮어가며 땋도록 배씨댕기를 썼다. 이것이 생후 첫 번째 머리장식인 배씨머리이며 바둑판머리는 배씨머리에서 3, 4년 지났을 때 했다.
가르마를 타고 양옆으로 가닥을 낼 때에도 제법 줄기를 이루는데 옆머리를 조랑조랑 땋아 내린 모습이 마치 바둑판 같다 하여 붙은 명칭이다. 사진에서는 두 줄기로 땋아 내렸다.3~4세 여자 아이의 땋은 머리 형태이다.앞가르마를 하고 좌우에서각각세줄로땋아내려가다뒷부분에서 합쳐 땋고 댕기를 드린다.가르마 중앙에 칠보장식의 배씨 댕기를 얹어준다,
새앙머리
조선시대 말 궁중 견습 나인들의 머리 모양이다 새앙은 생의 늘임 말인데 명칭도 모양도 전통적인 쌍계에서 유래한 것이며 새앙머리는 궁중의 견습 나인들만이 아니라 왕가의 소녀들도 했고 민간의 처녀들도 했다 이 것은 주로 미혼녀의 머리 모양이었다.
궁중의 소녀들과 외명부 집안 소녀들이 의례때 하는머리모양 이며두갈래로 땋은머리를 한데모아 위.아래로 가지런히 놓고 덩어리지게 잡아 맨후 댕기를맨다
어여머리
어여머리는 당대 명부, 특히 명부 중에서도 외명부가 주로 하던 머리모양이다, 왕족 중에서는 왕비를 비롯하여 출가한 공주와 옹주가 양 반가에서는 당상관 부인이 이용하였고 상궁 중에선 오직지체높은 지밀상궁만이 할 수 있었다.
어여머리를 하는 방법은 가리마 위에 어염족두리를 쓰고 가체로 땋아 만든 커다란 다리를 어염족두리 위에서 양 귓가와 목덜미 위로 감싸고 머리 뒤에는 붉은 댕기를 장식하고 머리 위와 양 옆은 떨잠으로 장식한다.
어염족두리는 야청색 공단에 솜을 두어 만든 것인데 어린이 베개의 중간을 잘룩하게 묶은 것 같은 형태이다. 정조 12년(1788)에 머리장식의 사치가 너무 심하여 비변사에서 올린 〈가체신금절목 加?申禁節目〉가운데"어유미(於由味)는 명부(命婦)가 평상시에 착용하는 것이나 평민가에서 잔치와 혼례 때에 사용하는 것은 금단하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민들의 혼례 때에도 어여머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간화한 어여머리는 무당들이 큰굿에서 머리를 올리는 방식으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죽은 자를 천도하는 경기도 바리공주 굿거리에서의 큰머리가 바로 그것이다.
첩지머리
첩지머리 모양 개구리 첩지 여러가지 첩지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쓰이는 첩 지를 얹은 머리로 첩 지는 장식과 형태 재료에따라신분을나타내고 예장할 때 쓰던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첩 지에따라신분의 상하를 표시 하였다.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쓰이는 첩지를 얹은 머리로 첩지는 장식과 형태 재료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고 예장할 때 쓰던 화관이나 족두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왕후는 용첩지,왕비와 세자빈은 광금(鑛金)황첩지,상궁은 은제 개구리 첩지,정경부인은 광금 개구리첩지,정부인은 후미만을 광금한 개구리첩지,상궁은 흑색 개구리첩지를 달아 신분의 상하를 표시하였다.
형태=
첩지머리의 양식은 앞머리 가르마 중앙에 첩지를 대고 첩지 양쪽머리를 좌,우 귀뒤로 돌려 쪽머리나 어여머리로 함께 묶은 것.이첩지의 장식은 화관이나 족두리 같은 장식을 쓸 때 이를 고정시키는 역활을 하므로 궁주에서는 평상시 첩지머리를 한는게 일반이었지만 그것응 신분상.하 구분과 궁중법도에 따라 어느때 족두리나 화관을 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이다
도금용 첩지=황후만 사용
도금 봉황 첩지=비와 빈만사용
은개구리 첩지(상궁이사용)
흑각 개구리 첩지=
각상궁들이 궁의 처소에서만 사용했으며 양반가에서는 부모나 남편의 상중에 했다가 상이끝나면 버려다고한다
도금개구리 첩지( 정경부인사용)
떠구지머리
왕족,궁인,반가의 여인들만 쓸 수 있었다.‘떠받치는 비녀’라는 용어에서 유래 된 떠 구지는 세조 원년, 중국 명나라의 면목계양에서 비롯된 머리 모양으로 명부는 상시 착용하고 궁중의 진연같은큰잔치에는 내인들도 했던 가체머리이다.
궁중에서 의식 때 하던 머리로 어여머리 위에 떠구지를 얹어 놓은 것이다. 큰머리라고도 한다. 떠구지는 나무 표면을 머리결처럼 조각하고 검은 칠을 한 것이다. 아랫부분에 비녀를 꽂을 수 있는 2개의 구멍이 뚫려 있고, 자주색 댕기를 맸다
대수머리
대수머리는 여러 개의 떨잠과 장식 꽂이, 비녀를 꽂은 큰 가발이다.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 복장인 대례복 차림에 사용 되었던 머리모양이다,그 모양이 매우 과대하고 화려 하였다. 여러 개의 떨잠과 장식 꽂이, 비녀를 꽂은 큰 가발이다.
궁중에서 가래식 때 황후가 하는 머리형으로 만들어진 가발을 사용하여 머리장식을 하였다.
어깨선 까지 내려온 쪽머리
쪽 머리
쪽진 머리는 기혼녀의 상징이다 여자가 15세가 되면 계례를 치르고 쪽 머리를 하였고, 15세 미만으로 혼인을하는경우에는혼인전날계례를하고쪽을지었다.계례를하고쪽머리를하던것이차차혼인과더불어쪽짖 게됨에따라일반사회에서의계례는없어지고궁의나인들사이에서만그습속이남게되었다
기혼녀의 보편적인 머리모양새로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으나 조선 순조 중엽부터 보편화되었다. 삼국시대의 쪽머리는 두발을 뒤통수에 낮게 트는 양식으로 쌍영총 벽화의 부인에게서 그 모양을 볼 수 있으며 각저총 건귁을 쓴 여인도 납작하게 쪽을 붙인 머리모양을 보여주어 이 쪽머리가 삼국시대의 공통된 두발양식이었음을 알게 한다.
쪽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비녀나 차(釵=두 가닥의 비녀) 같은 것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통일신라시대 여인은 흥덕왕의 복식금제를 통해 머리장식품이 매우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했음이 짐작되며 쪽머리 고정을 위해 비녀나 차(釵)를 사용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 쪽머리는 모든 전통머리의 기본형태이다
쪽머리는 결혼한여성의 두발형태 양반은 가운데를 가르마를 타고 앞부분만 살짝 오려빗은후양쪽으로 내려빗고 평민은 가운데가르마를 중심으로 해서올려 빗어준다 양반의부녀자는 쪽의위치가 목에닿을수있도록 낮게해 신분의 차이를 두며 쪽머리는 역사가 가장오래 되었으며주로 서민여성들의 머리 스타일
얹은머리
일반서민의기혼녀의머리며 여자의 머리를 땋아서 위로 둥글게 엊은 머리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의 풍속화에 까지 잘 나타나 있음
쪽진머리에 비녀와 뒤꽂이
쪽낭자머리
쪽진머리(쪽머리,쪽찐머리,낭자머리)와 비녀(잠,계,차),뒤꽂이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 결혼한 여자의 일반적인 머리 모양이다.이마 중심에서 가리마를 타 양쪽으로 곱게 빗어 뒤로 넘겨 한데 모아 검정댕기로 묶고 한가닥으로 땋아 끝에 자주색 조림댕기를 드리고 쪽을 찐 후 비녀로 고정시키는 형태이다.
비녀
는 쪽진머리에 꽂는 장신구이다. 모양은 대개 한 쪽 끝이 뭉뚝하여 빠지지 않게 되어 있으며 그 부분에 여러 가지 모양의 장식이 있다. 재료에 따라 금비녀,은비녀,백동비녀,유비녀, 진주비녀,옥비녀,비취비녀,목비녀,각비녀,골비녀 등으로 나누어지고 수식에 따라 봉잠,용잠, 원앙잠,오두잠,어두잠,매죽잠,죽잠,국화잠,석류잠 등으로 나누어진다.
뒤꽂이
는 쪽의 위아래로 꽂는 것으로, 아래쪽은 뾰족하고 위쪽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장식이 달려 있다. 장식을 위한 것이지만, 실용적인 기능을 겸한 뒤꽂이도 애용되었다. 머리빗의 때를 제거하거나 가르마를 타기 위해 사용하는 빗치개 모양의 뒤꽂이나 귀이개 모양의 뒤꽂이는 실용적인 도구에 장식성을 가미한 대표적인 것이다.
머리를 장식하는 헤어핀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우리 나라의 뒤꽂이처럼 귀이개나 빗치개를 머리 장식으로 만들어 사용한 예는 유일할 것이다.
트레머리 기생들이 트레머리를 만들고 있다
기생들의 머리모양 이며기녀머리는 크게 관기머리와 일반기녀트레머리로 나뉜며 다리를 굵게하여 틀어 엊은머리로 혼자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트레는 실타레에서 나온 말이며 머리모양이 실타레와 모양이 똑같슴니다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18세기의 작품으로 조선 후기의 복식과 가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가체
사치의 대상으로 지목된 가체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체는 부녀자들의 머리 장식에 필수가 되었다. 사람들은 높은 머리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되었는데, 이는 다리를 더하여 얹은머리를 높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가체가 성행하자
유학자들은 차츰 중국의 사례까지 들먹이며 고계(高?- 다리를 많이 얹어 높게 만든 머리 모양)와 광수(廣袖- 넓은 소매)를 사치의 대명사로 지적하고 백성들이 검소하게 지내야 한다며 이를 금지할 것을 촉구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시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복식(服食)’ 편에는 당시 부녀자들의 머리치장에 드는 비용이 너무 과다하다는 비판이 실려 있다.“지금 부인들은 비록 마지못해 세상 풍속을 따른다 하더라도 사치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
다리(月子)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웅황판(雄黃版)ㆍ법랑잠(法琅簪)ㆍ진주수(眞珠?)로 꾸며서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그 집 가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으므로, 부녀들은 더욱 사치스럽게 하여 행여 더 크게 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요즘 어느 한 부잣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한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가발의 종류
가발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었다. 어여머리는 대례식과 같은 의식 때 하는 머리로 비(妃),공주,옹주가 할 수 있고 양반가에서는 당상관 부인이 할 수 있었다.
어여머리=
는 1751년 이후로 시작되어 긴 머리카락을 땋아서 떠구지 모양으로 만들었던 것이 그 후 간편하게 되면서 나무로 비슷한 모양을 깎아 사용했다.
대수(大首)=
는 궁중의 의식용 가체로 의친왕비 김씨(1878~1964)도 대수를 했다. 큰 머리는 의식이나 혼인 때 사용했다. 큰 머리를 할 때 가발의 일종인 월자(月子)를 사용하기도 했다.
새앙머리=
는 궁중의 아기상궁이 하는 머리로 궁중에 들어올 때 사용했다.
첩지=
는 상류층 여성들이 액세서리로 사용한 가발이다.
얹은머리=
의 경우 서민들은 제머리만으로 얹은머리를 했지만 상류층 여성들은 가체를 사용해 얹은머리를 크게 했다. 신윤복(1758??)의 대표작인 미인도 속 주인공 여성도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의녀
약방기생이라고도 불렀는데, 내의원의 별칭이 약방이고 출신이 기생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요한 임무는 궁녀들에게 침을 놓아 주거나, 비빈들의 해산에는 조산원 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기생이 되어 원삼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는 색동 한산을 끼고 춤을 추는 무희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내외법에 따라 궁중에서 비빈을 비롯한 궁녀들이 남자의원의 진맥을 거부하여 죽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자 생겨난 것이다.
그 시초는 태종 때 창고궁사(倉庫宮司)의 어린 비자 중에서 수십 명을 뽑아 진맥과 침 놓는 법을 가르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별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연산군대에 들어와 이들의 주 임무는 서울 각 관청에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화장을 하고 기생으로 참가하는 것이 되었다.
이 제도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어 고종 때만 하여도 의녀의 수는 80명에 달했다. 이들은 이후 양의사가 궁중에 들어오면서 점차 없어졌다.세종 5년에는 지방에도 의녀를 두기로 하고 충청,전라,경상도에서 12~13세 정도의 똑똑한 여관비 두 명씩을 선발해서 제생원의 의녀들과 함께 가르쳤다.
이때의 교육은 내의,간병,초학의등 3등급으로 나뉘었으며 일정한 수준의 학업 성적에 미달되거나 하면 본래의 신분인 노비따위로 다시금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일단 교육을 이수하게 되면 의녀로서 지방의 관서에 배치될
수 있었다.
또한 의녀의 자식들은 평민의 신분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배려도 보장 이 되었다.
1) 재료에 따라서 분류한 비녀
종류
용도
금비녀
금으로 만든 비녀를 말하며 금잠(金簪).금전(金鈿).금채(金釵).라고도 한다
금봉채(金鳳釵)
봉황을 새긴 금비녀
목잠(木簪)
나무로 만든 비녀. 흔히 여자 상제(喪制)가 꽂음
비취잠(翡翠簪)
비취옥으로 만든 비녀.
산호잠(珊瑚簪)
산호로 만든 비녀
영락채(영락잠)
구슬이나 귀금속을 비녀머리부분에 꿰어서 만든비녀
은비녀
은으로 만든 비녀를 말하며은잠(銀簪).은채(銀釵)라고도 한다.
은봉채(銀鳳釵)
봉의 머리 모양으로 꼭지를 조각한 은비녀
옥비녀
옥으로 만든 비녀를 말하며 옥잠(玉簪).옥차(玉釵).라고도 한다
진주비녀
비녀에 진주 장식을 하여 만든비녀를 말한다
흑각비녀
물소나 소의 검은뿔로만든비녀
죽절비녀
대로 만든 값싼 비녀
2) 모양에따른명칭들
종류
용도
고리잠
부인들의 쪽찐 머리에 꽂는 뒤꽂이의 한 가지
각잠
(刻簪)
무늬를 아로새긴 비녀
국화잠(菊花簪)
대가리에 국화 모양의 장식이 붙은 비녀
말뚝잠
산호.옥.수마노 등으로 말뚝 모양으로 만든 비녀의 한 가지.비녀 머리의 윗부분이 둥글고 앞으로 조금 구부러져 있음
매죽잠(梅竹簪)
매화와 댓잎의 무늬를 새겨 놓은 비녀
매화―잠
(梅花簪)
매화 무늬를 새긴 비녀
민비녀
무늬도 새기지 않고 파란도 칠하지 않은 은비녀
봉잠
(鳳簪)
머리에 봉황의 모습을 새긴 비녀.봉채(鳳釵)
석류잠(石榴簪)
꼭지에 금이나 은으로 석류꽃 송이를 새긴 비녀
어두잠
비녀머리를 고기머리모양으로 만든비녀
오두잠(烏頭簪)
조선 시대에부인들이 보통 때 꽂던꼭대기의 한편을 턱지게 만든 비녀
용잠
(龍簪)
한쪽에 용의 머리 모양을 새겨 만든 비녀
연봉잠(蓮―簪)
여자의 머리에 꽂는 장신구의 한 가지. 금붙이로 연봉 모양을 만들고 산호를 물렸음.
큰비녀
큰머리나 낭자할 때에 꽂는 크고 긴 비녀
호두잠(胡桃簪)
옥비녀의 한 가지. 대가리를 호두 모양으로 깎아 만듦
3) 신분에따라서 분류
왕족은 봉잠(금봉채,은봉채등)을 귀족들은 금이나 은 보석으로 만든비녀를 서민들은 대나무나 나무 혹은 짐승의 뿔로만든 비녀를 사용하였다
종류
용도
봉황잠
봉황첩지
왕후의 품위에 맞는 봉황 첩지~!
용잠
도금비룡비녀
궁중에서사용된최상급용잠
용머리장식비녀
흑각죽잠
무소의 검은 뿔로 된 것을 대나무처럼 깎아 긴 비녀로 만든 것으로 중인 계급의 아녀자가 많이 사용했다.
나비모양비녀
옥봉비녀
이비녀는 왕실에서 평상시사용
비취용비녀
매화비녀
나무비녀
통일신라의목제비녀
이 비녀는 나무로 만든 비녀이다. 상중에는 계급과 빈부를 막론하고 근신의 표시로서 다같이 나무비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생활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길었을 것이라 생각되며 머리에 쓰는 관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거나 의례용인 것으로 판단된다. 비녀머리 한쪽 면에는 검은 색의 얼룩이 두 군데 묻어있고 나무비녀 전체에는 물감으로 칠한 흔적이 있다.
몸체에도 녹색이나 옥색의 얼룩이 곳곳에 보인다.
목제연봉비녀
밀화비녀
밀화덩어리를 초화덩굴의 형태로 다듬어 비녀머리로 만든 비녀이다. 비녀머리와 몸체의 사이는 파란장식 하였다
석류잠
석류모양장식한비녀
수정죽녀비녀
백옥비녀
완두잠
은비녀
죽절잠
개구리.매미가 대나무 줄기에 마주앉은형태며 백동잠으로 일반 부녀자가 머리에 꽃음
칠보매죽잠
비취민비녀
상류층부인들이사용
도금비룡잠
밀화비녀
상류층여성이사용
흑각석류비녀
물소뿔로 만든 상제용.궁에서 제례용으로 사용
흑각잠
옥비녀
골제비녀
동물의 갈비뼈를 갈아만듬
화유옹주
백동죽절비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를 다소 평면적으로 처리.사선과 꽃문희로처리
산호비녀
잠두에 매.새를 조각
대나무비녀
옥초롱비녀
흑각민잠비녀
도금쪽두리비녀
족두리를 고정시키기위한 비녀
호도비녀
매족문으로 호도모양으로 움직일때마다새.매화나비의떨쇄가떨려동적인미로 화려한 비녀로예장시사용
영락비녀
조각된옥잠위에도금된 대나무잎과산호.공작진.진주알로 화려함을 더하고 왕실서사용
백동버섯비녀
머리부분을 버섯모양으로 만든비녀.서민용과 일상용
은파란비녀
가을.겨울 양반부인들이평소에 많이착용
도금석류비녀
도금비룡잠
죽절비녀
은파란용비녀
은제용비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