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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우리나라 기록유산♣ .조선왕조 족보,조(祖)와 종(宗)의 차이 본문

우리역사

♣유네스코 우리나라 기록유산♣ .조선왕조 족보,조(祖)와 종(宗)의 차이

복담이 2013. 5. 13. 18:43

1. 훈민정음 

 

세종 28(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 1책으로 발간했는데,
이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다.
 훈민정음해례본.
한글창제가 상형원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 역시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7 10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록됐다.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 472년간(1392~1863)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며
  1,893 888책으로 돼있어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유네스코 우리나라 기록유산

1. 훈민정음
 
 

세종 28(1446)에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설명한 한문해설서를  전권 33 1책으로 발간했는데,이 책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고 했다.
훈민정음해례본.
한글창제가 상형원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존본은 1940년경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국내에서 유일한 귀중본이다.
한글과 같이 일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 이미 존재한 문자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고 독창적으로 새 문자를 만들고 한 국가의 공용문자로 사용하게

한 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새 문자에 대한 해설을 책으로 출판한 일 역시 역사적인 일이었다.
특히, 문자를 만든 원리와 문자사용에 대한 설명에 나타나는 이론의 정연함과 엄정함에 대해서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 문맹퇴치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세종대왕상을 주는 것은이 책의 문화사적 의의를 나타낸다.
훈민정음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7 10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록됐다.


2.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부터 철종까지 25 472년간(1392~1863)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며
  1,893 888책으로 돼있어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은
500여 년간의 왕정에 대한 기록이 하나의 체계 아래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군사,제도,법률,경제,산업,교통,통신,사회,풍속,

미술,공예,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와 함께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
정족산본 1,181, 태백산본 848, 오대산본 27,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
,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돼 있으며, 1997 10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3.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이
1372(고려 공민왕 21)에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 1권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 2권으로 엮은 것으로, 역대 고승들 간의 문답과 경전을 엮어  학승(學僧)들이 최고과정에서 배우던 교재였다.
'직지심체요절'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세계 최고 금속 활자제작의 근거를 인정 받은 동시에 원산지와 소유국이 다른 약탈 문화재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
현재는 하권만이 유일하게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특별 귀중본으로 보관돼있다.
하권은 39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첫째 장은 없고 2장부터39장까지 총 38장만이 보존되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는 간행에 관계된 기록이 있어 1
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1450년 독일의 쿠텐베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약 73년이나 앞선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직지심체요절'금속활자를 이용해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줬다
.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했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기름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유럽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 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4. 승정원일기

 

승정원은 조선 정종대에 창설된 기관으로서 국가의 모든 기밀을 취급하던 국왕의 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승정원 일기'는 일기 형식으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됐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으로 대부분 소실됐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다.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법제, 사회, 자연 현상, 인사, 국왕과 관료의 동정, 국정 논의가 광범위하게 기록돼있어 한국학 연구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승정원 일기'는
국사연구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인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그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다.
특히,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했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1999 4 9)로 지정돼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 9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 

5. 해인사 대장경판 제경판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해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87,000여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 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 2007 6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6. 조선왕조 의궤 


의궤는 국가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작성한 조선왕조의 기록물이다
.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선왕조 의궤' 600여년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년에 걸친(1392-1910)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돼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및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 영상자료처럼 당시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이런 시각중심(visual-oriented)
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 6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7. 동의보감

 

1613년 한국에서 집필된 의학적인 지식과 치료기술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국왕의 지시 하에 여러 의학 전문가들과 문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허준'이 편찬한 '동의보감'은 동아시아 의학의 발전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줬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백과사전인
'동의보감'동양의학의 총체적 접근법을 담고 있는,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들어, 19
세기까지는 유래가 없었던 예방 의학과 함께 국가적으로 이뤄지는 공공 보건정책에 대한 관념을 
세계 최초로 구축했다.

한국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일반 민중이 쉽게 사용가능한 의학지식을 편집한 세계 최초의 공중보건의서라는 점을 인정받은

'동의보감' 2009 7 31 '마쓰우라' 유네스코 사무청장이 바베이도스(Barbados) 브리지타운(Bridgetown)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9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회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승인했다.

전문가들은

'동의보감'질병 치료와 관련해 정신적·심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동양의학의총체적 접근법을 담고 있어, 단순한 기술적인 가치를 넘어 사회적·철학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봤다.
아울러 초간본 동의보감이

이상적인 보존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 중국 등과 기록(등재) 유산 비교
세계 주요 선진국의 기록유산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일본과 중국이다.  
의아할지모르지만 일본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것이 현재 아무것도 없다.
이미 기원전부터 기록문화가 시작되어서 유구히 내려오고 있는 중국도 등재된 것은 5개뿐이다.

그것도 기본적으로 청조 이후의 것들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록문화 보호의식 및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조(祖)와 종(宗)의 차이
 




조(祖)와 종(宗)의 차이
 
조선시대 왕의 명칭에서 조와 종의 차이 
개국군주 또는 국난 치른 왕은 '祖',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은 '宗'
 
조선시대 왕의 명칭을 보면 태조· 세조처럼 '조'(祖)를 쓰기도 하고,  태종· 세종처럼
'종'(宗)을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祖'와  '宗'을 쓰게 될까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를 모실 때 정하는 존호(尊號)를 '묘호'(廟號)라고 합니다.
묘호에는 종(宗)과 조(祖), 두 가지가 있는데 생전의 공적을 평가하여 붙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대체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나라의 정통이 중단된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는
'조(祖)'를 썼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은 '종(宗)'을 붙였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태조로 칭한 것이 대표적이지요.

반정(反正)을 통해 즉위했거나 재위시에 큰 국난을 치른 임금들도 대체로
조(祖)의 묘호를 가지게 됐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 등이 그렇고,  반정은 아니지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도 같은 범주에 들어갑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중종도 인종 초에 '조'로 칭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중종이 성종의 직계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종'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가 우세하여
중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조'가 창업이나 중흥을 이룬 왕에게 붙인다는 원칙 때문에, '종'보다 격이 높다는 관념이 은연중에 유행했습니다. 영조와 정조<사진>(정조의 어진)· 순조는 본래 영종과 정종· 순종이었으나,  고종 때 영조· 정조로, 철종 때 순조로 개정한 것입니다. 참고로 신라 왕 가운데 묘호를 쓴 이는 태종 무열왕밖에 없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만 조(祖)를 묘호로 썼습니다. 
 
묘호는 원래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당나라 고종이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너희 신라가 해외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람하게
썼으니, 그 뜻이 불충하므로 속히 그 칭호를 고치라." '삼국유사'엔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이뤘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썼다고 맞서서 그 뜻을 관철시켰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다른 왕들은 묘호를 못 쓰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 고려와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런 묘호를 쓸 수 있었을까요? 
고려 전기, 중국은 송·요·금이 서로 각축하면서 절대 패자(覇者)가 없었기에
고려가 황제를 일컬을 수 있는 국제환경이 조성됐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충렬왕· 충선왕 등으로 묘호를 쓰지 못했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임을 표방했으나 때로 중국의 협박을 받아가면서도 묘호만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제후국
이면서도 내부적으로 자존의식을 키우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의 교묘한 줄타기'라는 거지요. (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