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담
광해 -유쾌하게 웃을 수 있고 감동이 있는 영화(상암 월트컵 경기장 내 극장가.11.18일) 본문
광해군은 어떤 왕?
1623년 인조반정으로 16년 만에 폐위된 광해군은 후대 평가가 극명히 갈린다.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의 저자인 오 교수는
“과도한 궁궐 공사로 민생 파탄을 불렀고 내치에 실패한 왕”이라며
“대동법을 시행했다지만 재위 말년에 흐지브지됐다”고 평했다.
반면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의 저자인
한 교수는 “17세기 초에 대동법 시행으로 조세 개혁의 물꼬를 트고,
명나라와 후금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는 중립 외교를 편 왕”이라고 평했다.
그는 “당시 대동법은 혁신적 조처였다”며
“왕실 인척과 벼슬아치들의 반대가 심한 상황에서,
폐해가 많은 현물납(특산물 과세) 대신에
토지 소유에 비례해 쌀로 과세하는 대동법을 즉위 원년에 시행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있는 치적”이라고 말했다.
벽보의 사진을 담았더니 ..
이병헌- 1인 2역으로 왕과 천민 두 역을 한 영화 광해
광해군-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두려움으로 난폭해져 가는 왕 광해
자신을 대신해 위험해 노출시킬 인물을 찾을 것을 지시
하선(천민)- 외모도 왕의 흉내도 완벽한 하선이 궁에 끌려가 하룻밤 왕의 대역 완벽하게 한다.
그러던 어느날 광해는 쓰러지고..
국정의 혼란을 막기위해 도승지 허균은 하선에게 열흘간 광해군을 대신하게한다.
에민하고 난폭했던 전과 달리 인간미가 느껴지는 왕의 변화에 궁은 술렁이고 의아하게...
대역을 하고있는 하선은 점점 왕의 대역을 넘어 자신이 느끼는 진정한
왕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이런 하선의 모습을 보고 도승지 허균도 당황한다.
한효주- 중전
유승룡-도승지
김인권-도부장
장광 -조내관
심은경-사월이
감독 추창민-그대를 사랑합니다.사랑을 놓치다.마파도.작품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복담이가 느낀 광해
이병헌의 1인 2역 역활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늘 독살에 대한 공포와 광해의 목숨을 노리는
반대 세력의 사람들 때문 난폭해진 폭군 왕 광해 대신
천민 하선은 궁에서 생활하는
왕 광해의 언어,행동을 배우고
그대로 따라 하도록 지시하지만
차츰 자기만의 정치를 펼쳐나간다
난폭해진 광해의 역활을 그대로가 아니고...
정말 왕 광해보다
더 따듯하게 백성들을 보살피는 왕이 되어
도승지(허균)가 시키는 광해의 들러리가 아닌
자기 의지대로 백성들의 고통도 함께 아파하는 왕으로서 ..
중전의 웃음 잃은 표정을 배려하는 마음,
또한,진심으로 따듯하게 살펴주는 마음
사월이의 아픔,고통,눈물까지
함께 흘려주는 왕 "하선"으로
진심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왕의 모습을 보면서..
王(광해)를 가짜 王 하선을 통해서 비쳐진 영화
힘없는 백성을 가난한 백성을 섬기고 지켜주는 진정한 왕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
"나는 왕이 되고 싶소!
그러나 누구를 죽이고..죽여야 한다면...
왕이 되기싫소!"
이제 대선을 앞두고 광해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본 후
진정 국민을 살피고 고통,아픔,따듯한 배려의 마음으로 지켜주고
국민을 살필 줄 아는 대통령이 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천민 하선" 이었지만 왕 광해의 역활을 해내기까지
웃음과 감동의 눈물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시간을 내어 꼭! 한번 다녀오세요..
많이 웃어도 보시고..
감동의 눈물도 주루룩 흘리시며..
한번은 감상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2012.11월 19일.월요일.복담
광해군에 대한 내용을 공부해 봅시다 ^^ ^^
알면 더욱 재미있는 우리의 역사에 관해서
지루하시거나 눈이 피로하시면 스트레스 받지마시고
그냥 지나가셔요~하하하하하...복담ㅎㅎ
인터넷 자료를 첨부합니다.
1. 잠룡시절의 행적
선조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공빈김씨(恭嬪金氏).
비(妃)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의 딸이다.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에게서 소생이 없자,
공빈김씨 소생의 제1왕자 임해군 진(臨海君#진17)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광패(狂悖)하다고 하여 보류하고, 1592년(선조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분조(分朝)를 위한 국사권섭(國事權攝)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뒤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모집 등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합류하였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방위체계를 위해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이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하였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2. 영창대군 살해전말
이에 앞서 1606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과
그를 지지하는 대북(大北)사이에 붕쟁이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禪位)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소북파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져
왕위에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喬洞)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하였으나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이 성균관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다.
이듬해에는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으로 1백여인의 소북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 조령에서 잡힌 강도 박응서(朴應犀)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역모를 꾀하려 하였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하였다가 이듬해 살해하였다.
3. 인목대비 폐비·창덕궁 중건
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편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4. 외교정책
이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마침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으나,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 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5. 인조반정
그의 재위 15년간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유15)·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문화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 사진 전시작품/ ND - Natuur (0) | 2013.02.02 |
---|---|
계사년 새해에 듣는 ‘뱀 이야기’ (0) | 2013.01.05 |
파리 물랭호텔 신근수 사장님의 말씀 (0) | 2012.09.11 |
순수한 우리말 사전 (0) | 2012.09.11 |
깜박하기 쉬운 한자 (0) | 2012.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