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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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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원한 민족가수 "남 인수 "선생

복담이 2010. 3. 30. 21:34

조선 블로그   :    http://blog.chosun.com/jin5465/4499460

남_인수_쟈켓사진들.JPG

          남 인수 ! 1921년생이라는 說도 있고,선생은 최 창수가 본래의 이름이라는 분도 있습니다만, 이는 선생의 어린시절

          불우했던 과거사를 들처내야 하기에 호적에 등재 된 1918년 10월 18일생으로 강 문수로 등재된 내용을 맞는것으로

          출생년 또한 1921년이 아닌 1918년생으로 저는 정리 합니다.여기까지를 정리하자면 선생께서는 親父의 성씨가 최

          씨였다는 사실과 어린 선생을 데리고 선생의 모친이 개가를 했다는 설이 맞습니다. 선생의 가수로써 이름 남 인수

          라고 고처진 사연은 반 야월(또는 월 견초)로 불리는 "진 방남" 선생의 작명됐고, 금세기 내 나타나기 대단히 어려운

          타에 추종을 불허했던 선생의 맑고 호소력을 지닌 인물이 나올지가 의문 입니다.저음에서 중,고음을 조금도 무리함

          없이 처리 할수있는 유일한 인물로 우리 가요사에 남겨졌습니다.선생의 나이 18세에 <눈물의 해협,1936년취입>첫

          음반을 내고 그 유명한 "애수의 소야곡"을 38년도에 취입 했습니다.선생은 김 정구 선생과 같은해 같은날 OK레코드

          사에 입사, 두분의 생전의 친분은 형제와 같았고, 남 인수 선생의 최후를 가장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남 인수 선생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하신 이 난영여사의 남편 김 해송이 운영했던 악단에서 활동을 하다 6,25를 맞었고, 바로 그시

          기에 각혈을 했던 폐결핵환자로 당시의 의료체재로써는 불치의 병으로 치료를 위한 가족들의 노력이 컸었습니다.

          그러한 선생께서는 대중이 원하는 무대에는 누가 말려도 듣지않고 반드시 출현해 줬던 노래를 위하여 살다 떠나신

          기록을 남겼습니다. 민족의 비극 6,25로 이 난영여사의 남편(작곡가)김 해송의 납북소문도 있었으나 제가 알기로는

          북으로 끌려가다 폭격으로 사망한것으로 추정 합니다. 실의 에 넑을 잃은 이 난영여사를 도와 악단을 운영 하면서

          두 분은 동거를 하게 됩니다. 이 난영 여사의 남 인수 선생 살리기 간호는 극진 했습니다. 남 인수 선생께서 그 시기

          까지 레코드 취입곡만 무려 1,100여곡을 남겼는데 사실상 마지막 곡은 "무너진 사랑탑"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진주시민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바로 경남 진주시 평지동 진양공원 에 건립된 기념비와 동상 입니다

남인수_동산.jpg

   남 인수 선생께서 만주에서 살았다는 설과  일본에서 노무자로 유년기를 보냈다는 설과 선생의 학벌을 국민학교 졸업으로

   말하는 분들이 있으나 제가 믿기어렵다고 제시하는 아래 친필을 보시면 이해가 가실련지요?

                                

 

                        위의 글은 남 인수 선생의 친필임이 확인됐고, "반 야월"선생이 수취인 으로 되어 있습니다.

                        戰後 백약이 무효과로 "이 난영"씨의 눈물겹고,안타까운 간호도 선생을 회생 시킬수는 없는

                        사실에 "이 난영"여사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한 사실은 없었으나 마지막 각혈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며 세상을 떠나는 순간 임종을 지켰으니 1962년 6월 26일 새벽에 43세라는 아까운 나

                        이로 생을 마감 했습니다.임종소식이 퍼지자 각 방송 극장 모든 야간업소 까지 가무음곡 을

                        삼가했고, 국내 모던 방송국은 하루종일 남 인수선생의 노래만 들려줬던 두번없을 사실이

                        있었습니다. 이 난영 여사가 두어살 연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의 노랫말 처럼 "천년을

                        두고 같이 살자고 울며불며 맹서 한 님아 !  운명같은 선생의 마지막 노래 와 같이 "이 난영"

                        여사는 매일 술을먹고 눈물을 흘리며 사시다 남 인수선생 별세 2년후 "이 난영" 여사도 생

                        을 마쳤습니다. 남 인수 선생께서는 현재 미국에 부인과 2남2녀의 자식들이 살아있고.여사

                        역시 아들셋(김 부라더스 가수)딸 둘(김 씨스터는 3인이나 1명은 사촌입니다.가수) 각 각

                        살아 있으며 남 인수 선생과 동거소식에 대단한 반대를 했었습니다. 오리지널 입니다.

                                                                    

                                                   

 

 

언제나 그리운 노래 제1집 (.. - 무너진 사랑탑 - 남인수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출처 : 가정은 사랑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글쓴이 : 이 세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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