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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담

목화씨와 붓뚜껑 본문

문화공간

목화씨와 붓뚜껑

복담이 2011. 10. 23. 21:13

 

 

▲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문익점의 묘

 

◈ 목화씨와 붓뚜껑 ◈

이제 몇일후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이군요 그래서 그런지 조석으로는 벌써 싸늘함을 느끼기도 하지요 이때쯤이면 옛날에는 한겨울을 나기위한 준비를 시작하면서 많은 걱정을 했지요 우선 난방을 위한 땔감 걱정이었지요 겨우내 방도 덥히고 삼시세끼 밥도 해 먹으려면 땔감이 산더미처럼 많아야 했어요 그리고 반찬으로 김치를 미리 김장으로 마련하였으며 곳간에는 겨우내 먹을 곡식과 감자 고구마 등도 저장해 두었지요 그다음은 겨우내 입을 옷들을 준비 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춥지않게 솜을 넣은 솜바지 저고리 발을 따뜻하게 하는 버선, 남바위, 조바위, 풍차 등 추위를 막는 모자 팔뚝에 끼는 토시 등 많은 것을 준비 했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할수 있는 것이 목화(木花)였어요 목화는 따스한 솜도 솜이지만 실을 만들어 옷감을 만들수 있었으며 목화씨는 기름을 만들어 썼지요 목화는 원래 두 종류인데 다년생 목화는 원산지가 라틴 아메리카이고 1년생 목화는 원산지가 인도라고 하지요 목화로 만든 옷은 무명옷이고 누에고치에서 만든옷을 비단(緋緞)이라 하지요 그리고 삼나무(대마) 껍질로 만든 옷을 삼베라 하구요 모시풀로 만든 옷을 모시라 하지요 또 씨를 가리는 기계는 '씨아'라고 하고 실 잣는 기계를 '물레'라고 했어요 일찍이 삼베나 모시옷은 평민이나 하인들이 많이 입었으나 옷감이 너무 얇고 바람이 숭숭들어와 겨울엔 추위에 떨어야만 했지만 비단옷은 따스하긴 하나 너무비싸 양반들의 전유물이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평민들도 따스하게 지낼수 있는 무명옷이 만들어 지기 시작했어요 다름아닌 문익점(文益漸)이라는 훌륭한 선인 때문 이었지요 이분이 없었으면 우리 평민들은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요? 추위에 떠는 만백성은 엄동설한에 많이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요?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위인 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 그 분의 업적을 지금까지 많이 칭송하였고 또 앞으로도 그분의 큰 업적을 잊지말고 대대손손 길이길이 보전 해야 되나봐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 하지요 무슨 문제 일까요? 그럼 여기서 문익점이란 위인에 대하여 살펴보기로해요 문익점 위인은 고려 충혜왕 1년(1331)에 경남 산청지방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공민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 등의 벼슬을 지내고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던 1363년에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면서 목화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지요 일설에는 원나라에 간 문익점이 원나라 중진의 미움을 받아 중국 남방으로 귀양을가 그곳에서 목화의 소중함을 알고 목화씨 10개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5개는 본인이 땅에 심었고 5개는 장인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도록 했으나 본인 것은 모두 죽고 정천익 것에서 한그루가 싹을티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설은 원나라를 다녀오던중 눈처럼 하얀밭이 있어 물어보니 옷감짜는 목화라 하여 농부에게 목화 몇송이를 얻어 씨를 빼어 가져와 심었다는 설이 있다 하는데 묘한 것은 그 어느 기록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붓뚜껑에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요 [고려사]의 문익점 열전에 의하면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와 재배했지만 재배 방법을 몰라 대부분 죽이고 몇 그루만 살아남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태조실록]의 문익점 졸기에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역시 몰래 들여왔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재배되던 목화에서 씨를 십여개 따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고만 기록되어 있지 붓뚜껑은 찾을수 없다 하네요 그럼 도대체 왜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붓뚜껑에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것일까요?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고 오직 목화와 관련된 이야기 뿐인데 즉 목화 하면 문익점 이었지요 이 이야기는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부터 형성된 이야기였는데 즉 세월이 지나면서 문익점에게 목화의 사나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어떠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라 하지요 그 근거로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는 해외로 반출금지품목이 아니었으며 목화는 원나라 어느곳이든 쉽게 재배되는 흔한 품목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익점이 몰래 붓뚜껑에 목화씨를 넣어 들여왔다고 전래된 것은 어쩌면 사실관계를 극대화한 희극일수도 있다 하네요 또 하나는 문익점과 정천익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하구요 문익점은 정천익과 공동으로 면화사업을 꾸준히 벌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이는 분명 의복에 혁명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의 획기적인 일이었지요 이런 공으로 인해 신화적인 인물로 이야기를 극대화 하기위해 붓뚜껑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하는군요 그러나 역대 왕들또한 문익점의 지대한 공로와 위업을 기리기위해 태종대왕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封)하였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하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우라 하셨고 세종대왕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에 추서하고 부민후(富民侯)로 추봉(追封)하였다 하는군요 지금도 경남 산청에 가면 문익점의 발자취를 볼수 있으며 목화의 시배지라 하여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하네요 아무튼 그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미화 하였든 신화 하였든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문익점의 훌륭한 마음과 위대한 업적은 길이길이 칭송되고 보전 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이 드는군요 붓뚜껑의 신화는 별개로 치더라도 .........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조동렬(일송) *-

 

 

전시관에서 베 짜는 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I'll Be Faithful To You - Isla Grant & Al Grant

 
★JUL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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