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헤밍웨이는 스페인 말라가주의 론다를 ‘연인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가장 좋은 곳’이라 예찬했다. 120m 깊이의 타호 협곡 위에 조성된 론다는 깎아지른 절벽의 어깨 위에 새하얀 집들이 날개처럼 얹혀 있는 모양새다.
아찔한 절벽 마을 론다에 낭만을 더하는 존재는 협곡 위에 세워진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다. 신시가와 구시가를 잇는 이 아치형 다리는 18세기 말 42년에 걸쳐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끝에 완성됐다. 협곡 아래에서 누에보 다리를 올려다보면, 누구나 자연과 문명이 빚어낸 경이로운 풍경에 압도되고 만다.
지난달 중순 론다에 갔다. 헤밍웨이의 산책로(Paseo de E.Hemingway)를 지나 누에보 다리를 건넜다. 구시가의 미로 같은 골목도 걸었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오렌지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은은한 오렌지 꽃 향기가 났다. 누에보 다리 아래 협곡으로 가는 길엔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골짜기에서 불어온 미풍에 유채꽃이 한들거렸다. 협곡 반대편에는 올리브 농장과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어우러진 대지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 없이 낭만적일 것 같았다.
헤밍웨이가 매료된 것은 론다의 아름다운 풍광만이 아니었다. 헤밍웨이는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며 화가 피카소와 함께 투우 경기를 즐기고,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했다. 그의 마지막 생일도 론다에서 맞았다.
론다는 스페인 근대 투우의 발상지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도 이곳에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으로, 스페인의 투우장 중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힌다. 지금도 이따금 경기가 열리면, 아피시오나도가 몰려와 관중석 6000석을 가득 채운다. 열정이란 뜻의 스페인어, ‘아피시온’에서 파생된 단어 ‘아피시오나도’란 투우에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투우장 앞에는 18세기 근대 투우의 창시자 프란치스코 로메로(Francisco Romero)의 동상이 서 있었다. 론다 출신인 그는 ‘물레타(muleta)’를 고안하며 투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평가 받는다. 투우사가 황소를 자극해 체력을 소비시킨 뒤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순간을 노리는 결정적 도구가 바로 막대에 단 붉은 천 물레타이다. 황소를 몰 때 무용수처럼 절도 있는 몸동작 또한 로메로가 확립시켰다.
이후 대대로 투우사를 배출하며 로메로 가문은 투우 명문가로 등극했다. 특히 프란치스코 로메로의 손자 페드로 로메로(Pedro Romero)는 5000마리가 넘는 황소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전설의 투우사가 됐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의 이름도 ‘페드로 로메로’였다. 벽에는 박제된 황소 머리와 투우사의 사진, 투우 포스터 등이 훈장처럼 걸려 있었다. 고트 치즈 샐러드, 대구 스테이크 등에 ‘엘 시르코(El Circo)’라는 이름의 론다 와인이 곁들여졌다. 마치 황소 앞에 선 투우사의 몸짓처럼 강렬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힌 맛이었다. 스페인어로 건배를 외치는 일행들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 높아졌다.
헤밍웨이의 첫 장편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 제이크와 친구들이 떠올랐다. 스페인 투우 축제에 몰려와 와인과 분위기에 취해 방황하던 그들이 이 레스토랑 어딘가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에서 제이크가 좋아하는 투우사의 이름도 ‘페드로 로메로’였다. 헤밍웨이는 페드로 로메로를 최대한 위험에 몸을 노출시키면서도 황소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적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투우사로 묘사했다.
문득, 죽음과 맞서 싸우는 투우사는 매번 벼랑 끝에 선 기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기분 좋은 취기 탓일까. 살면서, 절벽 끝에 몰리더라도 론다를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밤이었다.